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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근세의 정치와 그 변천
  • (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의 관계

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왕권과 국가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비록 국초에 요동 지방과 여진 문제 등으로 이해가 엇갈려 양국 사이의 관계가 불편한 때도 있었지만, 태종 때부터 관계가 호전되면서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명에 대하여 1년에 수 차의 정기적인 사절을 파견하였고, 그 밖에도 수시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절의 파견은 그 목적이 주로 정치적인 것이었으나,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도 이를 통하여 행해졌다. 사절의 왕래를 통하여 수출된 것은 마필, 인삼, 화문석 등이었고, 수입되는 것은 견직물, 서적, 약재, 문방구, 도자기 등이었다.

그러나 조⋅명 간의 무역은 조선 사회에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즉, 명의 과다한 금⋅은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 국내의 금⋅은광을 거의 폐쇄하기도 하였고, 사치스러운 견직물의 수입으로 국내 수공업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명 관계는 실리 추구와 국토 확장을 둘러싸고 한때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뒤에는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국토의 수복

여진족(야인)은 고려 시대에 금을 세워 중국의 일부를 지배한 일도 있었으나, 몽고족에게 패망한 뒤로는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만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부족 단위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는 많은 여진족 집단이 우리 민족과 가까이 살면서 자주 소란을 일으켰다. 원래, 여진족은 반농, 반수렵의 상태에 있었으므로, 식량, 의류 같은 생활 필수품이나 농기구 같은 생산 도구를 조선에서 가져가야만 했다. 그들의 소란은 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여진족을 몰아 내고, 국토를 확장하려는 기본 목표 아래 화전(和戰)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먼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 등을 주어 우리 나라의 주민으로 동화시키는 동시에, 무역소와 상경 야인을 위한 북평관 등을 두어 국경 무역과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소금, 포목, 미곡, 농기구 등을 주었으며, 그들이 가져오는 공물은 말과 모피류 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약탈 행위는 완전히 그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써서 국경 지방에 많은 진, 보를 설치하여 각 고을을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고, 때로는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이 차례로 여진족을 토벌하여 4군과 6진을 설치하는 동시에, 북방 사민 정책을 활발히 실시하여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성종 때에도 신숙주, 윤필상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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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과 6진
4군과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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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이 북으로 뻗어 나감에 따라 사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수만의 남방 민호를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토관 제도를 활용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조선 전기에 지속적으로 실시된 이러한 사민 정책은, 북방 개척과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필요하였으며, 이는 또한 농병 일치의 제도와 주민의 지역 방어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여진족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및 동남 아시아와의 관계

고려 말에 빈번했던 왜구의 노략질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조선은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뛰어난 병선을 대량으로 건조하였으며, 화약, 무기들을 개량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200여 척의 함대를 조직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조선의 국력과 국방력이 급속히 강화되고, 한편으로는 일본 내의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왜구의 침략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뒤에서 왜구를 조종하던 일본의 봉건 영주들은 노략질이 어렵게 되자, 교역을 간청해 왔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교린 정책을 써서 약조를 맺고 제한된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세견선(歲遣船)이 왕래하면서 세사미두를 가져갔다.

교역은 부산포, 제포, 염포 등 3포에서 이루어졌는데, 수출품은 주로 쌀, 무명, 삼베, 서적, 공예품 등이었고, 수입품은 구리, 황, 향료, 약재 등이었다. 이러한 양국 간의 교역은 조선이 항시 우위에 서 있었으며, 조선으로부터 전해진 선진 문물은 일본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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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좌로부터 부산포, 제포, 염포)
3포(좌로부터 부산포, 제포, 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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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초기에는 류큐, 사이암, 자바 등 동남 아시아 각국에서도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 오고, 조선의 문물을 수입해 갔다. 특히, 류큐와의 문물 교류가 비교적 빈번하였다. 이에, 조선의 선진 문물은 일본 및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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