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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란과 호란

임진왜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화되어, 중종 때의 3포 왜란1) 중종 10년(1510) 3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 사건이다. 이 난으로 인하여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이후 제포만을 개항하게 하였다.을 비롯하여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였고, 국력의 배양과 군비 증강의 필요성을 내세운 이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 시대의 내란 상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수습되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그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고자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1592년 4월에 왜군이 침략을 개시하였다. 부산진과 동래성에서는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끝내 함락되었다. 왜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일과 신립으로 하여금 왜적을 막게 하였다.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역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막아 내지는 못하였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이어서 북상을 계속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전쟁 초기에는 왜군의 전력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육전에서는 조선이 극히 불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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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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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의 승리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이 북상하는 데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왔다.

이 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이순신이었다. 그는 1년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장해 두었다. 그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전라 우수영 및 경상 우수영의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은 마침내 좌절되고 말았다.

왜군은 해전에서의 이와 같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모든 함선들을 모아 총공격을 개시하고, 육지에서도 전라도 지방을 공격하게 하여 조선 수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적함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크게 무찔렀으니, 이것이 한산도 대첩이다. 또, 조선 수군은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또 다시 큰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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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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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승리로 우리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어, 적의 작전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의병의 항쟁

해전에서의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전의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 방위를 위해 일어선 것이다. 이 자발적인 무장 부대들은 나라를 위한 충의를 내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이라고 부른다. 의병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리, 유학자, 승려들이었고, 주력을 이룬 것은 농민들이었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또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로 싸웠으므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적은 희생으로도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가진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정면 공격을 피하고, 뛰어난 기동력과 매복, 기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곽재우, 조헌, 고경명, 정문부 등이 이끈 크고 작은 의병 부대의 활약은 성과가 매우 컸으며, 의병들의 빛나는 전과는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국민들 가슴 속에 자신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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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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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를 정비하여 관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관군의 전투 능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작전이 보다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전세의 전환과 왜군의 패퇴

육상과 해상의 모든 전선에서 조선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왜군에 대한 반격을 강화해 가던 중, 명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조⋅명 연합군은 왜적에게 점령당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쪽으로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였다. 이에 왜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늦추고, 자신들의 전열을 다시 가다듬기 위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양쪽이 서로의 주장을 고집하였으므로 3년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일본은 전쟁의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침입하였다. 왜군은 이순신이 파면되어 수군의 지휘권이 잠시 바뀐 틈을 타서 육지와 바다에서 총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조선군은 명군과 협동하여 직산에서 적의 북상을 막고 남쪽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재등용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으로 유도하여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또 다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수군은 도망치는 왜선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

왜란의 영향

왜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적 역량이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즉, 관군 차원에서의 우리의 국방 능력은 일본에 뒤졌으나, 전 국민적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일본을 능가하였다. 백성들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문화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 있어서 자발적인 전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력은 국방 능력으로 크게 작용하여 왜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각 지방의 자연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융통성 있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익혔으며, 대포와 함선 제조 기술은 단연 일본을 능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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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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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란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오랜 전쟁으로 인구가 격감되고, 농촌은 크게 황폐해졌다. 따라서, 국가 재정의 궁핍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응급책으로 공명첩이 대량 발급되었다. 또, 이몽학의 난과 같은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토지 대장과 호적이 거의 소실되었으므로 조세, 요역의 징발과 신분의 구분이 곤란해졌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형세가 크게 바뀌어 갔다. 조선과 명이 전쟁에 지친 틈을 계기로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문화적 후진국이던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활자, 서적, 그림 등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 등을 납치해 갔다. 이와 함께 조선의 성리학도 전해져서,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륙의 정세 변화와 광해군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북인 정권이 성립하였는데, 그들은 내정과 외교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먼저, 양안과 호적을 새로 작성하여 국가 수입을 늘리는 동시에, 전후에 피폐된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불타 버린 사고(史庫)를 다시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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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사고
태백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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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명이 쇠약해지고 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정세의 변화를 간파하여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강성한 힘에 눌려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임진왜란으로 조⋅명 양국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누루하치가 나타나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우고, 명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명이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조선에 공동 출병을 제의해 오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에 도와 준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신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강홍립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게 한 다음, 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 시대에는 이와 같은 중립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국내에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

광해군의 이와 같은 현실적이고 실리성 있는 외교 정책은 임진왜란 후의 복구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기하고자 인목 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저촉되는 약점을 드러냈다. 서인이 주도한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은 마침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호란과 그 영향

인조를 옹립한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외교 정책을 지양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 즉, 왜란 때에 도움을 받았던 명에 대해서는 대의 명분을 앞세워 친선을 도모하고, 후금과는 관계를 끊어 버렸다.

이러한 외교 정책의 변화 속에 후금을 자극하는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즉,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켰고, 인조 반정 후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구실로 하여, 후금은 군대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1627). 후금의 군대는 평안도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 황해도 황주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 이립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각각 적을 맞아 싸웠고,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본래 후금은 우리 나라보다는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쉽게 화의가 이루어져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였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이 더욱 커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에 대해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조정의 논의는 주전, 주화의 양론으로 갈라졌다. 결국, 대세는 척화 주전론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1636).

청 태종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쳐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였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45일간 대항하였으나,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청과 화의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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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호란
정묘⋅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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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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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도 짧았고, 또 국토의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으나, 청군이 거쳐 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하여 황폐해졌다. 이로 말미암은 적개심과 함께 문화적인 우월감이 겹쳐서 청에 대한 반감은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임경업이 명과 연결하여 청을 치려 한 사실이 있고, 17세기 중엽에는 북벌을 계획하였다.

북벌론의 대두와 나선 정벌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우리 나라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의 오랜 우방 국가로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등은 북벌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들로서, 군대를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의 계획을 세웠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북벌론은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 때에 가장 왕성하였으나, 그 뒤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쇠퇴하였다. 그 후에는 청의 문물이 발달함에 따라 도리어 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북학 운동까지 나타났다.

조선에서 북벌 운동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시베리아 지방에는 러시아 세력이 밀려왔다. 러시아 세력의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청은 정벌군을 파견하고, 아울러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동시켜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 한다. 나선 정벌에서의 승리는 조선 총수병(銃手兵)의 실력을 입증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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