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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사회 시설과 법속

(2) 사회 시설과 법속

사회 정책과 사회 시설

조선은 유교적인 민본주의와 농본 정책을 표방하여 여러 가지의 교화 사업과 농민 생활의 안정책을 실시하였다. 양반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 신분 질서의 유지와 농민의 생활 안정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무거운 조세와 부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으며, 관리 또는 양반 지주들로부터 가혹한 수탈을 당하여 전호나 노비가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이민이 되기도 하였다. 농민의 몰락은 유교 정치 이념에서의 위민 정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토지에 의존하고 있던 봉건 경제의 파탄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봉건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대책이 강구되었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노력하였다. 즉, 농번기에는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하였고,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불안정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여 환곡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춘궁기에 빈민들에게 양식과 종자를 빌려 주고 가을에 원곡만을 회수하는 환곡 제도는 원래 의창이 맡은 것이었으나, 의창의 원곡이 부족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물가의 조절을 맡은 상평창에서 이를 대신 맡게 하였다.

상평창에서는 의창에서와 마찬가지로,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었는데, 추수기에 원곡과 원곡의 감소분으로 10분의 1을 더 거둬들였다.

의창, 상평창의 환곡 제도 등이 국가 기관에서 운영된 것과는 달리, 사창(社倉)의 진휼책은 주민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사창은 원래 향약과 더불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지방의 양반 지주층에 의하여 운영된 것으로, 각종 재난에 대비하였다. 양반 지주층은 향약, 사창, 동약 등 향촌 규약을 제정하여, 한편으로는 향촌 사회를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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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동 동약
안동 하회동 동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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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의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와 진료를 맡았다. 특히, 동⋅서 활인서는 여행자,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시설은 당시의 농민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일 수는 없었으며, 다만 농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줌으로써 농토에서의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정부는 오가작통법, 호패법 등을 통하여 강압적으로 농민의 이탈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법률

조선 시대의 법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형법이었다. 형법은 경국대전의 형전으로 정비되었지만, 그 내용이 소략하여 주로 대명률에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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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경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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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가운데 가장 무겁게 다루어진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 등이었다. 이러한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법이 적용되었으며,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파면당하기도 하였다. 형별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5종으로 나누어졌다.

민사를 취급하는 민법은 주로 관습에 의거하였고, 분쟁의 해결도 행정관의 재량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법 중에서 가족 제도에 관계되는 것은 주자가례에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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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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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에 관해서는 종법과 조상의 제사 및 노비 상속이 중요시되어, 그에 대한 법규가 정비되었다. 물권의 관념과 토지의 소유권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현저히 발달하였다.

한편,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분명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서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장예원이 각각 그 권한을 행사하였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그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특히, 장예원은 노비의 장부와 그 소송을 맡아서 처리하고, 한성부는 수도의 일반 행정과 함께 토지, 가옥에 관한 소송 등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재판에 불만이 있을 경우에는,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가 있고, 신문고나 징을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법률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로 국민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와 민간 신앙

조선 시대에도 불교, 도교, 풍수 지리설, 도참 사상 등의 민간 신앙이 서민 생활과 밀착되어 국가 발전과 국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기에는 민간 신앙의 지나친 미신 행위를 막으면서 종묘, 사직, 문묘, 서낭, 명산, 대천 등의 제사 규범을 유교적으로 개편하거나, 민간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흡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정비책을 시행하여 그 교세가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에 대한 정비책으로서 도첩제를 실시하고,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고, 사원의 건립을 억제하였다.

불교 정비책은, 사회적으로는 불교적 윤리 사상을 유교적 윤리 사상으로 전환시켜 유교주의적 국가 기초를 확립하고, 경제적으로는 사원이 차지하고 있는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환수시켰다. 이는 토지와 노동력을 국가가 흡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서 취해진 현실적인 조치였다.

태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증가를 제한하고, 사원의 지나친 건립을 금하였다. 태종은 강력한 억불책을 시행하여 전국에 242사만을 남겨 두고 그 밖의 사원을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이어 세종은, 불교의 모든 종파를 선⋅교 양 종으로 통합하여, 양 종에 각 18사씩 36사만을 인정하였다.

태종의 강압 이래로 쇠퇴 일로에 있었던 불교는 세종과 세조의 개인적 신앙으로 한때 활기를 띠기도 하였으나, 성종 때 다시 강력한 억불책을 써서 도첩제를 전폐하고 출가를 일체 금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불교는 국가 지도 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민간 사회에서는 여전히 신봉되었다. 불교는 국가와 개인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종교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 민간 신앙의 하나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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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 석탑
원각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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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교 신앙도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도교는 무예를 존중하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하였으며, 사대부 사회에 은둔과 신선 사상을 심어 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에 잦았던 도교 행사를 줄여 재정의 낭비를 막으면서도 소격서를 두어 제천 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특히,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깃들인 마니산에서의 초제는, 도교 신앙이 민간 신앙과 연결되어 민족 의식을 높이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풍수 지리설과 도참 사상도 조선 초기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한양을 수도로 정한 것도 풍수 사상에 의해서 합리화되었으며, 특히 조상의 묘소를 잘 써야 한다는 풍수설에 의해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묘지 쟁탈전인 산송 문제(山訟問題)가 16세기 이후부터 많이 발생하였다.

이 밖에, 무격 신앙, 산신 사상, 삼신 숭배, 촌락제 등도 서민 사회에 널리 퍼졌다. 또, 농촌 사회에서는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과 함께 갖가지의 민간 신앙 행사가 있었는데, 농민들은 이러한 신앙 생활에서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되고, 소박한 무용과 음악 등의 정서 생활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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