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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경제 정책과 경제 구조

(3) 경제 정책과 경제 구조

경제 정책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했던 경험을 살려, 조선 초기에는 국력을 증진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 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처음부터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교의 왕도 정치 사상에서는 민생의 안정을 중요시하였고, 이를 위해서 농업을 진흥시키고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중농 정책을 국가 산업 시책의 기본으로 삼아, 문란했던 고려 시대의 경제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농 정책으로 인해, 토지 개간과 양전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5세기 중엽에는 경지 면적이 160여 만 결에 이르고,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킬 갖가지의 새로운 농법이 개발되었다.

물화를 제조, 교역하는 수공업과 상업은 국가의 통제 아래 자유로운 활동이 억제되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고,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폐단이 있다고 하여, 국가가 그 활동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한편, 유교적인 검약 생활로 인해 물자의 소비가 많지 않았으며, 교통 수단이 미비되고, 화폐의 유통이 부진하여, 상공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다. 또, 자급 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대외 무역도 부진하였다.

교환 경제의 부진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지 못하였다. 다만, 약간의 저화와 동전이 제조되어 포목 및 미곡과 병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책이 16세기부터는 농업의 발전을 비롯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해이해졌다. 따라서, 국내 상공업과 대외 무역은 점차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해 갔다.

토지 제도

조선의 토지 제도는 고려 말의 사전 개혁에서 완성된 과전법에 그 기반을 두었다. 과전법은 고려 후기 이래로 누적된 토지 제도의 모순을 일단 해결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세족이 축적한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함으로써 조선 왕조를 건국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해 준 것이었다.

과전법에서의 모든 토지는 국가가 수조권을 가지는 공전과 개인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준 사전으로 구분된다. 공전은, 원래는 대부분의 일반 농민이 소유하고 있던 민전을 국가가 징세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국가는 농민들에게 공전의 경작권을 보장해 주고, 이들로부터 조를 받았다.

사전에는 관리들에게 주는 과전,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 중앙 관부와 지방 관아에 지급된 공해전과 늠전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성균관, 4학, 향교에 소속된 학전, 사원 소속의 사원전 등이 있었다. 공신전은, 받은 사람이 대대로 세습할 수 있었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되었는데, 받은 사람이 죽으면 국가에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 중 일부가 수신전, 휼양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습되었다. 토지의 세습으로 인하여 신진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하여 15세기 후반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이 실시되었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16세기 중엽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고, 관리들은 오직 녹봉만을 받게 되었다.

한편,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토지의 사유 관념이 확산됨에 따라 토지 소유는 양반 지주 중심으로 보다 편중되어 갔다. 원래 각각의 토지에는 실제 소유자가 있었으며, 또한 수조율에 있어서도 사전의 대부분은 병작 반수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양반 지주들의 대토지 집적 현상은 토지 소유 관계에 있어서 지주 전호제를 강화시켰다.

사적 소유권과 병작 반수제에 입각한 지주제는 직전제의 소멸과 함께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토지의 사유화는 양반 관료와 지방 토호들의 매매, 겸병, 개간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렇게 집적된 토지를 보통 농장이라고 불렀다.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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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순천부 양안(서울 대학교 도서관 소장)
전라도 순천부 양안(서울 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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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토지 매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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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제도와 재정

농민은 국가에 대하여 전세, 공납, 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전세는 토지를 경작하는 대가로 수확의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이나, 15세기 중엽에는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법을 마련하여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 차등을 두어서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농민의 부담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이었으므로, 농민의 부담은 대체로 수확량의 2분의 1이었다.

이 밖에,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있었다. 공납은 관청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으로,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농민에게 있어서 공납은 전세보다도 더 큰 부담이었다. 더욱이 그것의 수납 과정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절차가 까다로웠기 때문에 온갖 폐단이 발생하였다. 또, 원래는 관찰사, 병사, 수사 등 지방관들이 국왕에 바치는 진상(進上)도 결국 농민의 부담이 되었다.

조세는 모두 현물로 납부하였는데,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경에 가깝고, 특히 평안도는 사신의 내왕이 잦은 곳이라 하여, 조세로 받은 것을 현지에서 군사비와 사신 접대비로 쓰도록 하였다.

수납한 조세는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는 해로로, 강원도는 한강으로 수송하게 하였으며, 경상도는 낙동강을 따라서 배로 상류에 수송하고, 이것을 다시 육로로 소백 산맥을 넘어 남한강을 통해 다시 배로 서울에 수송하였다. 이리하여 강가나 바닷가의 적당한 장소에 조창을 두었다. 이들 조창에서는 지방의 조세를 모아 두었다가 용산과 서강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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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도
조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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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남에게는 역의 의무가 있었다. 역에는 교대로 번상해야 하는 군역과, 1년 중 일정 기간 동안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요역이 있었다. 요역은 경작하는 토지 8결마다 한 사람씩 차출하며, 1년 중 동원 일수는 6일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임의대로 징발되었다.

이처럼, 국가 재정은 농민이 바치는 전세, 공납, 역이 중심을 이루고, 그 밖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을 국가가 경영하여 얻은 수입과,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로 충당하였다. 국가는 수입의 일부를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 공공 행사비,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비,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농민 부담의 가중

농민들은 왕실과 각 관청에 공납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바쳤다. 이것은 본래에도 무거운 부담이었는데, 이들 물품을 중간에서 대신 납입하고 농민들로부터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 제도가 생겨,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공납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되면 일족에게 대신 받는 족징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인징이 행해졌다. 이이와 유성룡 등은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공납을 쌀로 내게 하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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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의 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
유성룡의 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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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군역이 요역화되면서 농민의 괴로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원래, 신역(身役)으로서의 군역과 호역(戶役)으로서의 요역은 그 체계를 달리하는 성질의 것이었으나, 보법(保法)1) 조선 시대 양민이 부담하던 군역의 일종으로, 건국 초기의 봉족제를 세조 때(1464)에 개편하여 2정(丁)을 1보(保)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정군을 돕도록 하는 보의 제도가 통용되었다.의 성립으로 군정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요역의 담당자를 따로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군사가 바로 요역에 동원되면서, 군사들은 보인으로부터 받은 조역가(助役價)로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대립가(代立價)를 소속된 기관에 납부하면 담당관은 그것을 가지고 공사 노비나 유민을 사서 대립하게 하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행해졌다. 이 때, 대립가가 가혹하여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군적은 문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졌다.

한편, 환곡 제도는 당초 구휼을 목적으로 실시되었으나, 농민을 상대로 하는 일종의 고리대로 변하여 갔다. 본래,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했다가 추수기에 1할의 이자를 붙여서 회수하는 것이었으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서의 이자가 늘어남으로써 농민들에게는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이로써 각처에서는 유민이 발생하게 되고,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일대를 무대로 하여 활약하던 임꺽정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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