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5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정치 체제의 변화
  • (1) 통치 기구의 변화

(1) 통치 기구의 변화

비변사의 기능 강화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는 16세기 중엽 이래로 해이해지더니,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한층 더 와해되어 갔다. 지배 체제가 안고 있던 모순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이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양반 계층은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정치, 군사,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사회 변화에 대처하려 하였다.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통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비변사는 본래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6세기 초에 설치된 임시 기구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을 중심으로 수시로 군무를 협의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점차 국방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상설 기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비변사는 문무 고위 관리들의 합의 기관으로 확대되고,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와 내정까지도 관장하는 기관으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당시 정부는,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문무 고위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미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왜란의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잇달아 닥친 호란을 겪으면서 비변사의 기능은 계속 강화되었다. 비변사 회의에는 정승, 판서, 군영 대장, 유수, 대제학 등 국가 주요 기관의 장이 모여 정사를 의논하였다. 사회 혼란으로 정세가 어수선해지면서 사소한 일까지도 비변사 회의에서 의논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최고 정무 기관인 의정부와 6조는 실권이 없어져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된 것은, 의정부, 6조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통치 체제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였다.

5군영과 속오군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군사 제도의 개편도 역시 불가피하였다. 15세기에 정비되었던 5위제는 왜란 이전에도 이미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왜란을 당하여 결정적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왜란 중에 군사 제도의 개편 작업이 추진되었다.

5위제는 본래 농병 일치제(農兵一致制)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16세기 이후 현역 복무를 기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대립(代立)시키는 경우가 많아지자, 정부는 이를 양성화하여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사 제도의 불합리한 점을 깨달은 정부는 용병제를 토대로 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1) 훈련도감의 군인은 용병(傭兵)으로 충원되었다. 용병이란,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 군인으로서, 상비군(常備軍)의 성격을 띤 것이다. 따라서, 훈련도감의 설치는 군사 제도의 변화에 있어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이다. 비록, 전란의 위기를 맞아 미봉적으로 채택한 방안이라 하더라도, 훈련도감의 설치는 의무병제, 농병 일치제가 무너지고, 용병제 및 상비군제로 바뀌어 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는데, 이들 삼수병은 일정한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적인 상비군이었다. 훈련도감은 이후 중앙 군영의 핵심이 되었다.

훈련도감에 이어서 여러 군영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즉,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이 설치되었고,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이 설치되었으며, 정묘호란 후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두어 광주 및 그 부근 일대를 경비하게 하였다. 그 후, 북벌을 추진하면서 어영청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17세기 말에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마침내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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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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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5군영은 대외 관계 및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임기 응변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속 군사의 성격 또한 한결같지가 않았으니, 농민들이 번상(番上)하는 경우도 있었고, 용병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래로 진전되고 있던 신분제의 동요와 부역제의 해이, 그리고 수취 체제의 변동은 번상병제의 운영을 어렵게 하여, 결국에는 용병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한편, 지방군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의 진관 체제가 무너지면서,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동원되는 제승방략 체제(制勝方略體制)로 바뀌어졌는데, 그것은 왜란을 맞아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왜란 중에 진관을 복구하면서 속오군(束伍軍) 체제를 취하였다. 즉,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으로 편제하고, 속오법에 따른 훈련으로 국난 극복에 대처하게 하였다. 속오군은 농한기에 훈련에 참가하는데, 평상시에는 스스로 향촌을 지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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