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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취 체제의 개편

(1) 수취 체제의 개편

수취 체제 개편의 배경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는 두 차례의 전란으로 그 모순을 드러냈다. 이에, 조선 왕조의 지배 계층은 통치 질서를 재정비하고 붕당 정치를 정상화시켜, 그러한 위기를 우선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방안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지배 체제를 더욱 와해시켜 갔다. 지배 계급으로서의 양반 계층은 오히려 벌열화, 귀족화되어, 마침내 붕당 정치는 변질되고, 정국은 비생산적인 정치적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갔다.

지배층의 정치적 쟁점은 민생 문제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주로 예론이나 왕위의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의 무관하였다. 이에, 전후 복구를 위한 정부의 시책도 미봉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만은 날로 커 갔다.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미흡하자, 피지배층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상공업을 발전시켜 가면서 스스로 생활 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조(抗租), 거세(拒稅), 민란 등을 통하여 지배 권력에 대항해 나갔다.

피지배층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그러한 현실을 묵과만 할 수 없었던 위정자들은, 수취 체제를 조정하여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려 하였다. 또, 그것은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였다. 수취 체제에 대한 조정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 등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전세 제도의 개편

전란 후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농경지의 황폐와 토지 제도의 문란이었다. 전국의 토지 결 수는 왜란 직전의 150만 결에서 직후에는 30만 결로 격감되었는데, 그것은 경작지의 황폐와 토지 대장의 소실에 따른 결과였다. 따라서, 정부는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는 한편,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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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 개간은 신분 여하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허용되고, 개간자에게는 개간지의 소유권과 함께, 보통 3년간의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개간을 통하여 얼마든지 자기 소유지를 확대할 수 있었으므로, 왕실, 정부 기관, 양반뿐만 아니라 농민, 상인, 노비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이 개간에 참여하였다.

또, 정부는 농토의 확대와 더불어, 거기에서 나오는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서둘렀다. 이것은, 양안에서 빠진 은결(隱結)을 찾아 내어 다시 양안에 올려 세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결과, 광해군 때 54만 결에 불과하였던 전국의 토지가 인조 때에는 120만 결로 늘어났고, 숙종 때에는 140만 결, 그리고 정조 때에는 최고 145만 결까지 증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결 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수입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궁방전, 관둔전 등 면세지가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정부는 전세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5세기에 제정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매우 번잡스러운 것이어서 당시에도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였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시된 채 최저율의 세액이 적용되고 있었다. 전란 후, 농지가 황폐되고 농민이 궁핍해지는 상황 속에서, 정부는 이러한 관행을 법제적으로 확정시켜 전세를 풍흉에 관계 없이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永定法)1) 영정법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의 준말인데, 연분 9등법에 의하면, 수세율이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저 4두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4두 내지 6두로 통용되고 있었다. 농민이 궁핍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 세액도 제대로 징수할 수 없게 되자, 인조 때(1635년) 1결당 4두로 감하시킨 것이다. 그리고 세원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양전 사업에 관심을 보였는데, 토지 측량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양척 동일법(量尺同一法)을 실시하였다. 즉, 종래에는 토지의 등급에 따라 양전하는 자〔尺〕를 달리하였는데, 이제 토지를 측량하는 자를 통일하고, 그 면적을 표준으로 삼아서 수확량을 계산하였다.이라고 한다.

전세 제도의 개편으로 전세율이 종래보다 다소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병작농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전세 외에 여러 가지의 세가 추가로 징수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세의 부담은 증가되었다. 즉, 전세를 납부할 때에 여러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그 액수가 전세액 자체보다 훨씬 많아 실제 납부액은 법정 수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공납 제도의 개편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방식인데, 먼저 정부가 품목별로 국가의 연간 수요량을 책정하여 각 고을 단위로 배정하면, 각 고을에서는 주민의 호(戶)를 기본 단위로 하여 부과, 징수하였다.

그런데 공납은 농민의 생산 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과세량에 무리가 있었고, 고을에 따라서는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과세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공물 수납상의 가장 큰 폐단의 하나였던 방납(防納)이 생겼다.

방납인들은 생산되는 물품까지도 억지로 대납하면서, 농민들에게서 시가보다 높은 값을 받아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의 토지 이탈은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결과이지만, 일종의 조세 저항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농민의 토지 이탈은 더욱 촉진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정부의 재정 상태를 보다 악화시켜 갔다. 뿐만 아니라, 유망을 겨우 면한 농민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세는 물론, 유망민의 몫까지 내야 했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 능력은 한계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었으며,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대동법(大同法)이었다. 대동법이란, 민호에 토산물을 부과, 징수하던 공납을 토지의 결 수에 따라 미(米), 포(布), 전(錢)으로 납입하게 하는 제도였다. 정부는 수납한 미, 포, 전으로 공인(貢人)을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여 쓰게 되었다.

대동법은 17세기 초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실시된 이후, 찬반 양론 속에서 김육 등의 노력에 의해 점차 확대되어, 18세기 초에는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에 100년이란 기간이 소요된 것은,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이들의 이해를 배려하면서 확대,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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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실시 기념비
대동법 실시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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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조선 후기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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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실시로 과세의 기준은 종전의 민호에서 토지의 결 수로 바뀌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당 미곡 12두만을 납부하면 되었기 때문에 과중했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또 토지를 가지지 못한 영세 농민은 일단 과세의 부담에서 벗어났으므로 농민들은 대체로 대동법의 실시를 환영하였다.

이와 같이,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화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과세하였으므로, 보다 합리적인 세제라 할 수 있다. 또, 종래의 현물 징수가 미곡, 포목, 전화 등으로 대체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져 갔다.

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의 재정 사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한편으로 농민 경제도 일시적으로나마 안정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대동법의 실시는 오히려 양반 사회를 무너뜨리는 작용을 하였다. 즉, 상품 조달을 위한 공인의 활동으로 지방 장시가 성장하고, 또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자급 자족의 자연 경제가 유통 경제로 바뀌어 갔다. 한편, 공인이 부를 축적하게 되고, 상인 자본의 규모가 커져서 특권적 도고 상업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쌀의 집산지인 삼랑진, 강경, 원산 등이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대동법 실시로 인한 상품 화폐 경제의 성장은 궁극적으로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시켰고, 나아가 종래의 신분 질서, 경제 체제를 와해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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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도시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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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시행이 농민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나, 농민들은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국왕이나 왕실에 상납하는 진상이나 별공을 여전히 부담하였고, 지방 관아에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토산물을 징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수된 대동세의 일부는 중앙 정부로 상납하지만, 나머지는 지방에 유치하여 지방 관아의 경비로 사용하게 하였는데,2) 대동미는 봄, 가을로 부과되었는데, 봄에 거둔 것은 경창으로 상납하여 중앙 관아의 공물 구입비로 쓰고, 가을에 거둔 것은 각 고을에 비치하여 지방 관아의 경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유치미의 설정으로 지방 관아의 재정이 확충되었는데, 그 비율은 대동법 실시 초기에 경기도는 33.8%, 충청도는 41. 6%, 전라도는 58.4%, 경상도는 60.7%에 이르렀다. 시일이 지날수록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유치미(留置米)의 비율은 낮아져 갔다. 그것은 지방 관아의 재정이 그만큼 악화되어 갔음을 뜻하며, 따라서 수령 및 아전들의 농민 수탈이 다시 가혹해져 가는 원인이 되었다.

군역 제도의 개편

양역의 폐단이 날로 심화되면서 군역 제도의 개편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5군영의 성립으로 용병제가 제도화되자, 양인 장정들의 대부분은 1년에 2필의 군포를 내는 납포군(納布軍)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징수하는 군포 수입은 모두 5군영의 군사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경상비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군포 징수가 단일 관청에 의해 통일적으로 이루어져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5군영과 중앙 정부 기관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한 사람의 장정이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 역시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균일하지 아니하였다. 게다가, 정부는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재정 상태가 어려워짐에 따라 군포액을 점차 증가시켰다. 여기에 군포 수납의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수령, 아전들의 농간까지 겹쳐 백골 징포, 황구 첨정, 인징, 족징 등의 폐단이 자행되었다. 또, 장정 가운데서도 형편이 나은 사람은 납속 등의 방법으로 양반 신분을 사서 양역의 부담을 벗어났고, 이 때문에 양역의 부담은 가난한 농민층에게로 한층 더 집중되어 그들의 파산과 유망을 촉진시켰다.

양역의 폐단이 날로 심해지면서, 농민들은 유망이나 피역(避役)으로써 저항하였다. 이에,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자는 양역 변통론(良役變通論)3) 양역 변통론은 극한 상태에 다다른 양역의 폐단을 해결해 보려는 논의로서, 주로 현실을 직시하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농병 일치로의 환원을 주장한 유형원은, 그 전제로서 우선 농민에게 제도적으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호포론은 지금까지 양인에게 개인 단위로 부과하던 군포를 전국의 모든 가호에게 부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군역을 지게 되면 반상(班常)의 신분적 구분이 없어진다고 하여 반대하였다.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로서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양역 변통론은 공전제에 토대를 둔 농병 일치로 환원하자는 주장과, 양반층에게도 군포를 부담시키자는 호포론(戶布論) 등으로 제기되었다. 전자는 토지 개혁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고, 후자는 영조와 일부 관료들이 시도하였지만, 대다수의 양반들이 양반의 군포 부담을 강력히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정부는 이 같은 양역 변통론을 절충하여 시행하였는데, 이를 균역법이라 한다. 이로써 농민들은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만 부담하게 되었다.

정부는 줄어든 군포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일부 상류 신분층에게도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이름으로 군포 1필을 부담시켰다. 그리고 지주에게서 토지 1결마다 미곡 2두를 결작(結作)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또, 종래의 각 궁방이나 아문에서 받아들이던 어세, 염세, 선세 등도 균역청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군포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자, 한때 농민의 부담은 가벼워졌고, 농민의 피역 저항도 다소 진정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정부의 장정 수 책정이 급격히 많아짐으로써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군액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족징, 인징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자, 군역의 폐단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끝내 찾지 못하고 전국적인 농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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