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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3.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 (2) 경제 생활의 향상

(2) 경제 생활의 향상

경제의 활성화

정치 체제 및 수취 제도의 개편으로 영⋅정조 시대에는 어느 정도 정치 질서가 확립되고, 민생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의 재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은 정부가 제도를 개편하고, 정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노력에 있었다기보다는 피지배층 스스로의 역량에 그 원동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피지배층은 지배 체제의 제약을 무릅쓰고, 경제 성장과 사회 변동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 나갔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침체된 생산력을 높이면서 자신들이 당면한 어려운 생활 조건을 스스로 개선해 나갔다. 농민들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했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영농 방법을 개선하고, 소득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였다. 한편, 농촌을 떠난 농민의 일부가 도시로 모여들면서 도시의 상권이 확대되고, 자유로운 상공업 활동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경제의 활성화는 새로운 경제 체제로의 발전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변화, 즉 산업 활동의 진전에 따른 경제 변화는 경제 문제 자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변동을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

조선 후기의 농업은 커다란 진전과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생산력의 증대와 경영 방법의 변화라는 두 측면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

양 난으로 전국의 농토는 극도로 황폐해졌고, 그에 따라 농민층은 생업의 기반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업에 그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지배층에게는 위기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서둘러 농경지의 확충에 나서, 개간 사업을 널리 장려하였다. 그러나 개간 사업은 오히려 지주층의 토지 겸병과 지주제를 확대시켰을 뿐, 농민은 소유지를 잃거나 감축당해야 했다. 농민들은 생존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즉, 농법의 개량을 통하여 수확을 증대시킴으로써 활로를 개척하여 갔다.1) 농법의 개량은 생산자의 기술적 문제에 속하는 것으로서, 주로 경작 농민층에 의해 추진되었다. 즉, 지주층의 토지 겸병이 날로 확대되면서, 자기의 토지가 축소되고 상실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그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 농민들은 농업의 개량을 통해 수확의 증대를 꾀하게 되었다. 농법의 개량은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업 경영의 전문화와 다양화를 촉진시켰다. 농법의 개량은 수전 농업이나 한전 농업에서 모두 진행되었다. 전자에서는 직파법이 이앙법(移秧法)으로, 후자에서는 농종법이 견종법(畎種法)으로 개선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의 발달은 농민 경제의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15세기의 벼농사는 수전이나 한전을 막론하고,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우는 직파법이 일반적이었고, 못자리에 모를 길러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은 남부 지방 일부에만 보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앙법을 일반화시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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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노동력을 덜어 주고, 수확량을 증대시켰다. 또, 이앙법은 논농사에 있어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여 농민의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모작의 발달로 농민들의 보리 수확량은 증대하였고, 더구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농민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앙법의 발달이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수리 시설의 발달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정부는, 가뭄의 피해를 우려하여 이앙법을 금지하였으나, 농민들은 정부의 이앙법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수리 시설을 개발하면서 이앙법을 계속 확산시켜 나갔다. 농민들은 주로 작은 규모의 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서 물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수천 개소에 달하였다.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시비법을 개발하고, 농기구를 개량하는 데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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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의 도별 저수지 수
19세기 초의 도별 저수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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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세기에는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곡물 외에 담배, 인삼 등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높여 갔다.2) 정약용에 의하면, 당시의 상품 작물로는 서북 지방의 담배, 한산 지방의 모시, 전주 지방의 생강, 강진 지방의 고구마, 황주 지방의 지황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에서의 수익은 논농사에 비해 10배 이상이 된다고 하였다. 담배는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전래된 후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서 재배되었고, 인삼은 18세기부터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삼남 지방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였으며, 그 밖에 목화, 약재, 고추 등도 인기 있는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이에, 농업 생산은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어 갔다.

영농 기술의 발달은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경영의 변화도 일으켰다. 즉,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들은 1인당 경작 면적을 보다 넓혔다. 그리하여 부지런한 일부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여 광작(廣作)을 할 수 있었다.3)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민 1인당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종래보다 약 5배로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력을 약 80% 가량 감소시켰다. 이에 따라 경작 능력이 증대하면서 농민들은 많은 농지를 경작하게 되었는데, 지주들은 토지 자체의 확대를 통해서,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 경영의 확대를 통해서 광작을 해 갔다. 직파법으로 10두락도 못 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두락 내지는 40두락까지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농가의 경작 면적이 넓어지는 광작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당연히 농가의 소득도 높아져 갔다. 자작농의 경우는 물론,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어서 차차 경제적 여유가 생겨났고, 그 결과 농민 중에는 경영형 부농도 생겨났다.

그러나 일부 농민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한 광작 농업은, 한편으로는 다수의 농민을 농촌에서 떠나게 하였다. 이앙법으로 노동력이 적게 들어 광작이 가능해짐으로써 가난한 소작 농민들은 소작지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로 나아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고, 심지어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앙법의 발달, 광작의 보급은 부농층을 발생시킨 반면, 농민의 토지 이탈을 가져와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지대의 변화

농업 경영상의 이와 같은 변동은 지주권의 약화와 전호권의 성장을 가져왔고,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병행하여 지대(地代)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이 시기에는 여전히 병작 반수제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일부 지방의 농민들은 소작료의 인하를 요구하는 항조 운동을 벌였다.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을 반씩 나누는 종래의 타조법(打租法)은 전세와 종자, 그리고 농기구를 소작인이 부담하게 되어, 농민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게다가, 작황에 따라 지주의 이윤이 좌우되므로, 지주의 간섭이 심하여 농민의 자유로운 영농이 제약되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로 도조법(賭租法)이 나타났다. 도조법은 농사의 풍작과 흉작에 관계 없이, 해마다 정해진 일정 지대액을 납부하는 것이다. 도조법에서는 대개 수확량의 약 3분의 1을 지주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소작인에게는 타조법보다 유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지권을 가진 농민은 지주에 대하여 보다 자유로운 관계를 가지면서 농업 경영을 할 수 있어서 생산 의욕을 높일 수 있었다.4) 도조법에서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치는 정액 소작료를 도지라고 하는데, 도지 소작에 있어서는 소작농이 자기의 소작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소작권을 자유로이 타인에게 매매, 양도, 전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농업 경영에 있어서도 영농 방법과 작물의 선택까지도 자유로이 할 수 있었고, 총 생산량 중에서 계약된 도지 이외의 분량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어서 생산 의욕을 더욱 높였다.

민영 수공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수공업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종래의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성장하여 갔다. 무기나 자기의 제조 분야에서는 여전히 관영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품질도 우수하였지만, 이들도 점차 민영 수공업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관영 수공업의 쇠퇴는 부역제의 변동과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본래, 관영 수공업은 부역제에 토대하여 운영된 것이었다. 즉, 경공장과 외공장 등의 수공업자들은 모두 각 관아에 등록되어 일정 기간 노동력을 징발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를 전후하여 장인들은 가급적 등록을 기피하였고, 또한 정부의 재정 사정이 악화되면서 관영 수공업 체제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사장(私匠)이 대두하게 되었다. 관아의 통제에서 벗어난 사장들은 비교적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장들보다 앞서 갔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정부는 18세기 말에 마침내 장인의 등록제를 폐지하고, 나라에서 직영하는 관영 수공업장에도 사장을 고용하였다. 수공업자들은 이제 독립적인 민영 수공업자가 되어, 장인세(匠人稅)를 부담하는 납포장으로서 자유롭게 제품 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이래 도시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전,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관수품의 증대는 생산 활동을 보다 촉진시켰다.

그런데 민영 수공업자들은 대개 공인이나 상인들로부터 주문과 함께 원료와 자금을 선대(先貸)받아 제품을 생산하였다. 즉, 수공업자들은 상업 자본에 의해 지배되거나 이에 의존하였으므로, 아직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 판매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특히, 종이, 화폐, 철물 등의 제조 분야에서 그러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점차 독자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수공업자들의 독립 현상은 주로 놋그릇, 농기구, 모자, 장도(粧刀) 제조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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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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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를 위해 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지만, 점차 농촌에서도 나타났다. 농촌의 수공업은 종래 부업의 형태로서 자급 자족을 위한 제조였으나, 점차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농가도 증가하였다. 농촌에서는 주로 직물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다.

광산의 개발

수공업 제품의 유통 및 수요의 증가는, 그 원료 생산을 위해 광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조선 초기 이래로 광업은 국가가 직접 경영하여, 사적인 광산 경영이 통제되었다. 광산의 경영은 정부가 수요 액수를 일률적으로 정하여 부과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들은 부근의 농민들을 부역 동원하여 채취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영 방식은 많은 무리를 자아냈고, 폐단도 많았다.

16세기 이래로 농민들은 광산에서의 부역 동원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사채(私採)를 허용하고, 대신 세금을 받아 내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광산의 개발이 보다 촉진되었는데, 특히 대청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엽에는 거의 70개소에 이르는 은점(銀店)이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었으므로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광산을 개발하면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금광, 은광을 몰래 개발하는 이른바 잠채(潛採)가 날로 성행하였고, 이로써 큰 자본을 모은 이도 생기게 되었다.

자유 상업의 발달

조선 왕조는 수공업과 광업뿐만 아니라, 상업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그 활동을 규제하였다. 다만, 중앙 관아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시전 상인의 활동만이 보장되었을 뿐이었다. 또, 여러 분야의 생산 활동도 물품의 유통을 자극할 만큼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17세기 이후에 이러한 상업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졌으며, 농촌에서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 인구가 늘어났다. 게다가, 정부의 수취 체제 개편으로 조세의 전세화 및 지대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상업의 발달이 보다 촉진되었다.

조선 후기의 상업 활동에서의 주역은 공인(貢人)과 사상(私商)이었고, 그들의 상행위는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 활동에서 두드러졌다.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나타난 공인은 관청과 결탁한 어용 상인으로서, 관아에서 공가(貢價)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은 서울의 시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사상의 활동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들은 정부로부터 금난전권(禁亂廛權)5)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이 가졌던 일종의 독점적 전매 특권으로서, 그들의 상업 활동과 이익을 침해하는 상행위를 규제할 수 있었다. 즉, 시전 상인들은 판매하는 물품 목록을 관에 등록하게 하였는데, 일반 상인이나 다른 시전에서 그 물품을 팔면 난전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난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금난전권은 점차 무의미해졌고, 마침내 정조 때(1791년)에는 난전을 합법화하였다.을 얻어 내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상들은 이에 대항하여 종루, 이현, 칠패 등에서 상행위를 계속함으로써 번창해 갔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결국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도고로 성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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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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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청, 일본과의 대외 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 시기의 사상으로는,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상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의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사상 가운데서도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자라났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삼아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이나 그 밖의 물품의 운송과 판매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여 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상의 성장은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교환하였는데, 일부의 장시는 점차 상설 시장으로 되어 갔다. 또,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그 중에서 일부는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으니, 이 중에서도 강경, 전주, 안성, 대구, 안동 등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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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의 구역도(자료 : 임원경제지)
장시의 구역도(자료 : 임원경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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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의 발달은 단순히 물화의 유통에 그치지 않았다. 도고 상업이 확대되고, 또한 지방 장시가 성장함에 따라 큰 상업 도시에는 도매업과 더불어 위탁 판매업, 창고업, 운송업, 숙박업, 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나 여각 등이 나타났고, 거래를 붙이는 거간까지 생겨났다. 개성 상인들은 거래 상황을 기록하기 위하여 독특한 부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외 무역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발해졌다.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한 공적인 무역과 사적인 무역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청에서 들여 오는 물품은 비단, 약재, 말,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을 비롯하여 가죽,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또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 주는 중계 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는데, 이 중에서 은을 다시 청에 수출함으로써 중간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의주의 만상과 개성의 송상, 그리고 동래의 내상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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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조선 후기의 상업과 무역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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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입품 중에는 사치품이 많았고, 수출품 중에는 은과 인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국가 재정과 민생에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던져 주기도 하였다.

화폐의 보급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전화(錢貨)가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대동미와 기타의 세금도 차차 전화로 납부되고, 지대도 전화로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화폐의 보급은 상품 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즉, 상인이나 지주들은 전화를 재산으로 여겨, 늘어난 재산을 전화로 바꾸어 간직해 두고 유통시키지 않았다. 이로써, 전화가 많이 주조되어도 유통 화폐는 계속 부족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전황(錢荒)이라고 한다.

전황 문제가 심각해지고, 또한 전화가 고리대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일부의 실학자들은 전화의 보급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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