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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5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3.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 (3) 사회 구조의 변동

(3) 사회 구조의 변동

신분제의 변천

경제 구조의 변동으로 부농층이 생겼는가 하면, 임노동자도 생겨났다. 그리고 상업 자본가와 독립 수공업자 등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종래의 사회 계층 구성을 변질시켜 마침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다.

조선 사회의 신분제는 법제적으로는 양천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기본적 가치관이었던 성리학적 질서는 이러한 신분제를 합리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간에 일어난 극심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자기 도태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보다 현저해져서, 권력을 장악한 일부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몰락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어 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나 농촌 지식인은 대개 몰락 양반이어서 양반 지주와는 이해 관계를 달리하였고, 기본적으로 농민층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반 계층의 자기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는 속에서도 양반의 인구는 점차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인구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부를 축적한 농민들은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신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한편, 노비들 중에는 도망을 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혹은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하여 상민이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정부에서도 상민이 줄어들고 양반이 늘어나는 것은, 국가 재정상으로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상민의 증대를 위해 노비를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공노비를 단계적으로 풀어 주어, 19세기 초에는 약 6만여 명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려,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종래의 신분적 지배 예속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사회 불안의 고조

신분제의 동요는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에 커다란 위기 의식을 가져왔다. 게다가, 지배층과 농민층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하였다.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농민 경제는 파탄에 빠졌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서, 곳곳에서 적극적인 항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관 오리들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재난과 질병은 더욱 빈번히 되풀이되었다. 1820년에는 전국적인 큰 수재를 겪어야 했다. 이듬해에는 중국을 통해 유입된 콜레라가 만연하여 전 국민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고, 그 뒤 수년 동안 피해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전국 곳곳에서 기민과 유민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나 참위설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민심은 갈수록 불안해졌다.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일어났다. 그러한 무리 중에는 무기를 휴대한 화적이나 수적도 있었는데1) 화적들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토호나 부상들을 공격했고, 수적들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왕래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비교적 규모가 큰 도적 집단으로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서강단(西江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폐사군단(廢四那團), 유민들을 중심으로 한 유단(流團), 광대들이 형성한 채단(彩團) 등이 있었다., 그들은 점차로 집단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 때, 밖으로부터는 서양 세력이 접근해 와, 연해안에는 이양선(異樣船)이 빈번히 출몰하여 위기 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

농민의 항거

사회 불안이 고조되는 속에서,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유교적 왕도 정치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세도 정치로 전개되어 퇴색해 갔고, 한때나마 다소 기운을 찾았던 농촌 경제 역시 파탄에 이르렀다.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 오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탐관 오리의 부정과 토색은, 이른바 삼정의 문란을 극도에 이르게 하였다. 또, 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도 관리의 수탈 못지않게 컸다.

가난에 쪼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 걸식하거나, 세금을 피해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과 몰락 양반들은 이 같은 가혹한 상황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였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보다 강해져갔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이나, 탐관 오리를 비방하는 벽서(壁書) 운동2) 벽서 운동은 농민의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로서, 부정과 비리가 심한 관리의 가렴주구를 폭로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물론 익명이었다. 농민들이 지방관을 고소하게 되면 오히려 무고죄로 처벌되었기 때문에 익명으로 하였다. 방서 운동(榜書運動), 괘서 운동(掛書運動)이라고도 한다.을 전개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이른바 민란을 일으켰다.

농민의 항거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9세기 초에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19세기 중엽에 진주에서 발단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임술민란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몰락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농,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로서, 세도 정치의 부패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점거하고,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이 실패한 이후,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지에서 도적들이 횡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마침내, 탐학에 시달리면서도 세력을 키워 가고 있던 농민들은 임술민란을 일으켰다. 농민의 항거는 진주에서 비롯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 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항거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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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농민 항쟁
19세기의 농민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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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더욱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은 결국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를 붕괴시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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