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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5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3. 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 (4) 사회 불안과 종교계의 변화

(4) 사회 불안과 종교계의 변화

민간 신앙의 성행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과 생활 규범은 유교였고, 이는 예학으로서 형식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교는, 형(刑)은 양반에까지 올라가지 않고, 예(禮)는 서민에까지 내려가지 않는다는 통념과 같이 철저한 지배층의 논리였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변동이 격심하였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유교 사상은 더 이상 사회 운영의 원리로서 기능할 수 없었고,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채 관념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회가 변동하고, 기존의 가치 질서가 무너지는 속에서 비기, 도참 등에 의한 예언 사상이 유행하였다. 즉,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 없는 낭설이 비기, 도참을 빌려 나돌았다. 정감록도 이 때에 유행한 비기였다. 예언 사상은 19세기 초엽부터 현저하게 나타나, 정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이 빈발하였다. 예언 사상의 현실 부정적 성격은 당시 농민의 항거 운동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한편, 불안과 학대에 시달리게 된 피지배층 사회에서는 무격 신앙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복락을 미륵 신앙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고통과 불안에 허덕이는 서민 대중을 현혹하는 무리도 나타났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사회의 불안 속에서 더욱 번성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당시 피지배층의 정신적 피난처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의 전파

천주교는 17세기에 베이징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서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다. 그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서양 문물의 하나로 간주하였을 뿐, 신앙을 위한 종교로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학문적 대상이었던 천주교가 종교 신앙으로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정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실학자들의 일부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활동1)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 운동은 선교사의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문적 연구와 자율적 구도 활동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7세기 이래, 서양의 학술 서적과 종교 서적이 전해지자, 이를 구해 읽은 권철신, 이벽 등은 천주교 교리서의 천주를 그들이 일찍이 읽었던 유교 경전의 천(天)과 접합시킴으로써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그 후 자율적으로 교리 연구와 신앙 활동을 펴 나갔다.을 전개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는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서, 서울에 이어 내포, 전주 등에도 신앙 공동체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정부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천주교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제사 의식을 무시하며, 신분 질서에도 위협이 되고 있음을 주목하고, 드디어 이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조 때에는 시파를 우대하였는데, 이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큰 탄압은 없었다.

그 후, 순조가 즉위하여 벽파가 득세하자 대탄압이 가해졌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시파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실학도 급속히 퇴조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 후, 시파인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천주교 조선 교구가 설치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니 교세가 점차 신장되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의 박해가 있었으나, 오히려 천주교의 교세는 더욱 확대되어 갔다.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커져 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이 어려워짐에 따라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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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박해와 교세의 신장
천주교의 박해와 교세의 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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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발생

세도 정치 아래에서 고통을 받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그들의 저항이 실패로 끝나는 경험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점차 농민을 위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동학이 나타났다.

동학을 창시한 사람은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였다. 동학 사상은 사회 지도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 세력과 연결된 천주교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서학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동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학 사상은 전통적인 민족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도 일부 흡수한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특히, 철학으로서의 동학은 주기론에 가까웠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은 샤머니즘과 도교에 가까워 부적과 주술을 중요시하였다.2) 동학에서는 한울님〔天主〕을 모시는 일과 ‘弓弓乙乙’의 부적 휴대를 중시하였고, 인내천 사상에 의해 인간의 평등과 존엄, 그리고 주술에 의한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불로장생(不老長生)을 내세웠다.

사회 사상으로서의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하늘의 운수 사상을 내세웠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학은 운수가 끝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을 내포하였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워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배척하였다. 이와 같이,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동학이 창시되자, 이를 따르는 신도가 늘어나 삼남 일대에 퍼졌다.

동학도의 세력이 날로 번성하자, 정부에서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교단 조직을 정비해 나감으로써 그 세력은 날이 갈수록 뻗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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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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