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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서민 문화의 대두

의식의 확대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문화계에도 반영되어, 종래의 양반 중심적인 문예 활동을 비판하고, 일반 서민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는 문학과 예술이 대두하였다. 특히, 역관이나 서리 등 중인층의 문예 활동이 활발하였고, 상민이나 광대들에 의해서 우리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판소리가 보급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학 작품은 대개 성리학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생활의 교양이나 심성 수양의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림이나 음악 등 예술에 있어서도 양반들의 교양이나 여가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에 인간 감정의 적나라한 묘사나,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고발 정신이 강하게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도 영웅적인 존재로부터 서민적인 인물로 전환되어 갔고, 문학의 배경도 비현실적 세계보다는 현실적 인간 세계로 옮겨 가고 있었다.

한글 소설과 사설 시조

조선 후기의 문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 많이 나타나고, 그 형식도 주로 소설이나 사설시조로 바뀐 점이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은, 서얼 차대의 철폐와 탐관 오리에 대한 응징을 주장하는 등 시대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이상향을 추구하였다. 한편, 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춘향전은 원래 판소리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상민이나 천민도 양반과 동등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서민들은 수령에 대한 춘향의 항거를 통해서 평등의 요구를 실감할 수 있었고, 춘향이 자기의 사랑을 실현하는 결말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밖에, 사씨남정기, 구운몽,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임경업전 등이 읽혀졌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당시의 야담이나 민담을 작품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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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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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시조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종래의 시조는 사대부들이 그들의 기상이나 절의를 나타내고자 했음에 대하여, 17세기 이후의 시조는 서민들이 중심이 되어 서민들의 생활상이나 남녀 사이의 사랑을 읊었고, 또한 기탄 없는 비유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였다. 서민의 소박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면서, 그 형식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설시조로 바뀌었다. 18세기에 서리 출신의 시조 작가인 김천택과 김수장은 역대의 시조와 가사를 모아 각각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를 편찬하여 문학사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세기 이래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서민의 문화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1) 판소리는 한 편의 이야기를 창(唱, 소리)과 아니리(이야기)로 엮어 나가면서 불렀던 것으로서, 서민 문학적 요소와 함께 사대부적 문학이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사대부층에게는 물론, 일반 민중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문학 장르로 성장해 갔다. 판소리는 광대들이 한 편의 이야기를 가창과 연극으로 연출하여, 읽는 소설보다 훨씬 흥미를 돋우었는데,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배비장타령 등은 매우 인기 있는 판소리 작품이었다. 판소리 사설의 창작과 정리에 공이 큰 사람은 19세기 후반의 신재효였다.

한문학도 국문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록, 한글로 표기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 시기의 한문 소설은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한문 소설로는 박지원의 작품들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을 통해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자신의 실학 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록 한문체이기는 하지만, 옛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문체를 개발하여 문체의 혁신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서민들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인(同人)들이 모여 시사(詩社)2) 조선 후기에 중인, 상민, 천인 들이 문학 활동에 참여하면서 시인 동우회인 시사를 조직하였는데, 대표적인 시사로는 천수경 등의 옥계 시사, 최경흠 등의 직하 시사, 박윤묵 등의 서원 시사 등이 있었다. 이들 시사에서는 동인지로서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선(風謠續選) 등의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를 조직하여 같이 즐기기도 하였고, 정수동, 김병연(김삿갓) 같은 풍자 시인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예술의 새 경향

조선 전기의 그림은, 자연 속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풍이 특색이었다. 이러한 경향을 이어서, 17세기에도 산수화가 널리 그려졌다. 특히, 김명국은 통신사의 일행으로 두 차례나 일본에 건너가 일본 화단에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발전을 보이면서 윤두서, 정선, 심사정 등 거장이 나타나더니,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이 나와 회화사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정선은 우리 나라의 자연을 그려 내는 데에 알맞은 구도와 화법을 창안해 냈으니, 이른바 진경 산수화(眞景山水畫)라는 화법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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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인왕제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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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는 조선 후기 회화에서 새로이 나타난 또 하나의 중요한 경향이었다. 김홍도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밭갈이, 추수, 집짓기, 대장간 등 주로 농촌의 생활상을 그리면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소탈하고 익살맞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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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씨름도
김홍도의 씨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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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신윤복은, 주로 도회지 양반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의 풍습, 그리고 남녀 간의 애정을 풍자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기법에 있어서도, 김홍도가 간결하고 소탈한 필치인 데 비하여, 신윤복은 섬세하고도 세련된 필치를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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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선유도
신윤복의 선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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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세기 말 이래로는 서양 화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이 나타났는데, 강세황과 김수철 등이 그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대체로 실학적 화풍이 시들고, 그 대신 복고적인 화풍이 다시 유행하였다. 신위, 장승업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 후기에는 민화가 발달하였다. 대체로,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민화는 거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는데, 해, 달, 나무, 꽃, 동물, 물고기 등이 주요 소재였고, 때로는 농경이나 무속의 풍속도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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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까치와 호랑이)
민화(까치와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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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는 서민의 오랜 생활 양식과 밀착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발상 등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보다 짙게 담겨져 있다. 민화는 정통 회화에 비하여 묘사의 세련도나 격조는 뒤떨어지지만, 익살스럽고도 소박한 형태와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구성, 그리고 아름다운 색채가 매우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민화의 유행은 조선 후기 서민층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편, 서예에 있어서는 김정희가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자기 개성에 맞게 발전시킨 추사체를 확립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전기, 오경석 등이 그의 필법을 이었다.

이 밖에,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는 백자가 계속 유행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청화 백자가 새로이 발달하였다. 청화 백자는 흰 바탕에 푸른 색깔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으로, 청아한 한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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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백자
청화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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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은 18세기 말에 완성된 수원성이다. 수원성은 종래의 성곽과는 달리, 화포를 배치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건축된 성곽으로서, 공학상으로도 견고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성곽 양식의 장점을 살려서 축조한 특색 있는 건축물이다. 17세기에는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법주사의 팔상전 등이, 18세기에는 평양의 대동문, 불국사의 대웅전, 그리고 19세기에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이 건축되어 당시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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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성
수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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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예술에 있어서도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서민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고, 지배층의 문화는 서서히 퇴조하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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