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5차(하)
  • Ⅱ. 근대 사회의 발전
  •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3) 개항 이후의 사회적 변화

(3) 개항 이후의 사회적 변화

평등 사회로의 이행

문호 개방 이후에는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의하여 전통적인 사회 체제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근대적 사상이 전래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일부 선각적인 양반, 중인 출신의 인사들은 개화 사상을 수용하고, 개화당을 조직하여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갑신정변 당시의 개화당 정부는 14개조의 개혁 정강에서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행정 기구의 개편 등을 내걸고, 근대 사회의 건설을 위한 대개혁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수구 세력의 방해와 청의 무력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의 민중들은 개화당의 개혁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적대시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 비롯된 민중의 저항 운동도 계속되었다.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와 봉건적 수취 체제에 불만을 가진 농민의 저항 운동은, 인간 평등과 사회 변혁에 기초한 동학 사상과 결합하여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12개조의 폐정 개혁안에서, 탐관 오리의 처단,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차별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고,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운동은 양반 중심의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갑신정변과 동학농민 운동이 수구 세력의 방해와 외국의 무력에 의하여 좌절된 뒤에,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노력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이어졌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국정의 모든 분야에 걸친 개혁이었으나, 그 중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를 폐지한 사회 개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양반,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 광대 등 일체의 천민 신분을 폐지하였으며, 공사 노비의 제도를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하였다. 또,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등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였다.

확대보기
갑오개혁 전의 재판 광경
갑오개혁 전의 재판 광경
팝업창 닫기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일본의 영향하에서 그들의 침략을 위한 체제 개편의 성격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제로는 조선의 개화 관료들에 의하여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의 기반 위에서 추진되었으며, 이로써 차별적인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 평등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사회 의식의 변화

차별적 신분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여 곧바로 평등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회 일반의 의식의 변화와, 보다 구체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노력은 독립 협회의 민권 운동에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신분 제도 타파 의식을 분명히 보여 주었으나, 그것이 근대적 사회 의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갑신정변과 갑오⋅을미개혁은 근대적 사회 의식을 보여 주었으나, 그것이 바로 민권의 확립에 의한 민주주의 사회를 기약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민중과 유리된 한계성도 가지고 있었다. 독립 협회 운동은 이러한 문제점을 발전적으로 보완하며 추진되었다.

독립 협회는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으로 민중을 계몽하였다. 이러한 민중 계몽 운동에 의하여 민중의 근대적 정치, 사회 의식이 높아졌고, 높아진 민중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적 민중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에, 독립 협회와 민중은 국권 수호 운동과 민권 보장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독립 협회의 국권⋅민권 운동에 의하여, 제한된 범위나마 자유 민권에 입각한 민주주의 사상과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 보급되었고, 민중에 바탕을 둔 자주적 근대 개혁 사상이 정착되었다.

확대보기
독립 협회 회보
독립 협회 회보
팝업창 닫기

만민 공동회에서 시전 상인이 회장에 선출되고, 관민 공동회에서 천인 출신인 백정이 연사로 나섰다는 사실은, 새로운 평등 사회의 출현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독립 협회 운동에 동조하기 위하여, 가게 문을 닫은 상인에게 순검이 와서 문을 열라고 했을 때, “지금 세상은 옛날과 다르니 당신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한 상인의 말은, 당시의 사회 의식 변화와 사회 자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백정 박성훈의 관민 공동회 연설문(1898)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 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 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 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바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독립 협회 운동의 맥은 대한 제국 말기에 애국 계몽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적극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운동, 교육 운동, 산업 개발 운동, 언론 활동 등을 폭넓게 추진하여, 민중의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 애국 계몽 운동의 영향으로 국민의 교육열이 고양되어, 근대 교육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근대 지식과 근대 사상이 점차로 보편화되어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