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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1. 독립 의식의 성장과 3⋅1 운동
  • (3) 3⋅1 운동

(3) 3⋅1 운동

3⋅1 운동의 태동

국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을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어,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세계 평화안 등이 논의되었다.

이에 힘입어, 독립 투사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의를 전달하고, 국제적인 협조를 얻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 투사들의 모임인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파리에 파견하였다.

한편, 국내의 애국 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권 피탈 이래 세계 정세의 변화를 깊이 주목하면서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도쿄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 정부에 통고한 뒤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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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 선언서
2⋅8 독립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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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학생들의 독립 시위 운동은, 즉각 국내의 민족 지도자와 학생층에게 알려졌다. 그리하여 민족 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시위 항쟁을 구체화하였다.

3⋅1 독립 선언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마침내 1919년 3⋅1 운동을 일으켰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각급 학교 학생들과 애국 시민들이 시가지로 나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온 민족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파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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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의 만세 시위
3⋅1 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의 만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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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육⋅해군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정당한 요구를 주장하던 우리 민족은 무차별 총격에 의하여 살상되었고, 가옥과 교회, 학교 등 건물이 방화, 파괴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당하였다.1)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들을 교회에 집합시킨 후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또,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투옥당하고, 일본 경찰로부터 비인도적 악형을 당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유관순의 순국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23,098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사람은 46,948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3⋅1 운동의 확산

국내의 각 지방으로 파급되어 가던 3⋅1 운동은 즉각 국외로 확산되었다. 만주 길림에서의 독립 선언은 국내보다 앞서서 1919년 2월에 민족 지도자 39명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었다.2) 이른바 무오 독립 선언이라고 불리는 ‘대한 독립 선언서’의 발표일에 대해 학계에서는 1918년 11월이라는 설, 1919년 2월설, 1919년 3월 1일 이후라는 설 등 논란이 있다. 그러나 시위 운동으로까지는 확대되지 않다가,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용정을 비롯하여 북간도와 남만주 지방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들이 시위를 전개한 이래 각지로 파급되었다. 한편, 하와이, 멕시코 등지의 교민 대표들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국외의 3⋅1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일본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2⋅8 독립 선언을 하여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3⋅1 운동의 의의

3⋅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우리 민족은 3⋅1 운동을 통하여 주체성을 확인하였고,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천명하였다.

3⋅1 운동은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한 쾌거였으며, 일제에 동조하던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3⋅1 운동은 중국, 인도 및 중동 지역에서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인 운동이 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3⋅1 운동은 민족 독립 운동을 국내외의 거족적인 항쟁으로 유도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한민족 스스로 민주 공화제의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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