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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독립 전쟁
  • (2) 국내의 독립 전쟁

(2) 국내의 독립 전쟁

무장 항일 투쟁

3⋅1 운동 이후, 무장 항일 투쟁의 본거지는 만주와 연해주가 그 중심이었으나, 국내에서도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무장 단체로는, 평북의 동암산을 근거로 무장 활동을 하던 보합단, 평북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대를 들 수가 있다. 국내에서 편성된 이들 독립군 부대는,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 파괴, 일본 군경과의 교전, 친일파 제거, 군자금 모금 등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치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그 후,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의 집요한 반격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 통의부에 편입되었다.

애국 지사들의 활동

무장 항쟁 중에는, 애국 지사들이 개별적으로 전개하였던 의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국외에 조직된 항일 단체에 소속되어,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들어와 일제에 항거하였다. 그 중에서 김원봉 등이 조직한 의열단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인 애국단원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들은 일제 요인의 암살, 식민 통치 기관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투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투탄, 나석주의 동양 척식 회사 투탄 의거 등이다.

한편, 국외에서는 김지섭의 일본 동경 궁성 투탄, 이봉창의 일본 국왕 암살 미수,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투탄, 조명하의 타이중 의거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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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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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 운동

192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속에서, 독립 운동은 그 진로 모색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1926).

6⋅10 만세 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린 사건으로, 일제의 수탈 정책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비판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6⋅10 만세 운동은 전문 학교 학생과 사립 고등 보통 학교 학생, 그리고 사회주의계에 의해 각각 추진되었다. 순종의 인산 당일, 일제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행사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규모의 군중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6월 10일 당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각급 학교에 연쇄 반응을 일으켜 확산되어 갔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3⋅1 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각종 민족 운동과 국내외의 항일 투쟁은 청년 학생들에게 민족 자주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6⋅10 만세 운동은 청년 학생 자신들 스스로가 민족 독립 투쟁의 전위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6⋅10 만세 운동 직후부터 경향 각지의 각급 학교에 크고 작은 항일 결사가 조직되었으며, 이 조직을 통하여 식민지 차별 교육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의 형식으로 치열한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1927년에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의 활동으로 국민들의 자각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건하에서 광주에서 일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한⋅일 학생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을 검거, 탄압하자, 광주의 모든 학교 학생이 궐기하였고(1929), 이에 일반 국민들도 가세함으로써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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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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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194개의 각급 학교 학생 54,000여 명이 참가함으로써 3⋅1 운동 이후의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만주에까지 확산되어, 이 지역의 민족 학교 학생들도 참가하였고, 일본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도 궐기하였다.

이처럼, 3⋅1 운동 이후에도 민족의 독립 항쟁은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계승되었고, 특히 학생들이 독립 투쟁의 주역으로 바뀌어 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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