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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2. 대한 민국 임시 정부와 독립 전쟁
  • (3) 국외의 독립 전쟁

(3) 국외의 독립 전쟁

독립 전쟁의 방향

거족적인 3⋅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급선무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이미 3⋅1 운동 이전부터 무장 독립 운동의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간도를 비롯한 만주나 연해주 일대를 무장 세력의 육성 기지로 삼아 왔다. 따라서, 이들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100여만 명의 동포 사회를 기반으로 많은 항일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 기지화를 꾸준히 추진하였으며,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1)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의군부, 광복단, 태극단, 광한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대한 통의부, 광정단 등의 독립군 조직이, 연해주에서는 혈성단, 경비대, 신민단 등이, 미국에서는 국민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독립군들은 편제를 재정비, 강화한 다음, 무장을 갖추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일제 군경과의 항전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수많은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하였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군, 대한 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의 독립군 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교전을 하면서 군자금 조달, 밀정 처단, 독립 정신 선양 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신 전과를 기록한 것은,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 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이 거느리는 북로 군정서군과 국민회 산하 독립군이 거둔 청산리 대첩이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한 독립군은 독립군 본영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함께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이를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19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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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현장(현 길림성 도문시 봉오동)
봉오동 전투 현장(현 길림성 도문시 봉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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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일본은 한국 내에 주둔한 부대와 관동 지방에 파견된 부대 및 연해주 지역의 부대를 동원하여 동, 서, 남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북로 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의 연합 부대는 이들 일본군의 대부대를 맞아 6일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대파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1920. 10.).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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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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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큰 타격을 받은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식민지 통치의 위협으로 여겨,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2) 간도 지방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학살된 한국인은 혼춘현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영안현에서 17명, 그 밖의 현에서 804명이나 되었다.

독립 전쟁의 시련

일본군은, 청산리 대첩 등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해 있는 만주의 한민족에 대해 대량 학살과 촌락의 방화, 약탈, 파괴를 자행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뒤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약소 민족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에게 이용당하고, 끝내는 무장 해제까지 당하는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1921).

그러나 독립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역량을 강화하여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는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성립되었고, 길림(吉林)과 봉천(奉天)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일대에서는 정의부가 성립되었다.

또, 북만주 일대에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 영토에서 되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만주의 여러 독립군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셋으로 통합되었다. 이들은 각기 그 곳 한민족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주적 민정 기관을 두고 입헌 정치 조직까지 갖추었으며,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은 군정 기관도 아울러 구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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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군의 대일 항전
무장 독립군의 대일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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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이 지역을 근거로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항전을 계속하였고, 특히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먼저, 지청천이 인솔하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 등지에서 일⋅만 연합군과 전투를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흥경성, 영릉가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 후, 독립군의 대부분은 임시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일부는 만주에 잔류하여 중국 항일군과 같이 항일연군을 편성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한국 광복군의 결성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숙원 사업인 한국 광복군의 창설을 시도한 것은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였다. 광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결전을 벌이는 길이 최선이며, 국제 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임시 정부가 군사 계획을 추진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훈련받은 병력의 부족이었다.

임시 정부의 김구, 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전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산재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하던 수많은 청년을 모아 마침내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이보다 앞서,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 쪽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 각지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 광복군은,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전쟁에 참전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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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훈련 중인 한국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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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고, 연안(옌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의 조선 의용군은 화북, 만주 지역에서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대일 선전 포고와 한국 광복군의 활약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여러 번 옮겨 다니다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 정부 체제를 본토 수복을 위한 임전 태세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각지의 무장 세력을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으로 통합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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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의 사열식
한국 광복군의 사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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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즉각 대외 활동을 펴 대일, 대독 선전 포고문을 발포하였으며, 한국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다. 그리하여 한국 광복군은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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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성명서(사본)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성명서(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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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전에 참전한 한국 광복군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포로 심문, 암호문 번역과 선전 전단의 작성, 회유 방송 등의 심리전에 참가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중국과 동남아 일대에서 대일전에 참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우리의 손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 진입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총사령관인 지청천, 지대장인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연합하여 국토 수복 작전의 임무를 맡은 국내 정진군의 특수 훈련을 실시하고 비행대까지 편성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 광복군은 그 해 9월에 실행하려던 국내 진입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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