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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북한의 공산화와 6⋅25 전쟁

(2) 북한의 공산화와 6⋅25 전쟁

북한 정권의 수립

광복 이후,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어, 중앙 정부의 수립을 기다리면서 자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민족의 자치 조직체인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하고 인민 위원회의 구성을 서둘렀다.

소련 군사 당국은 민족 진영 인사들을 설득시켜 민족 총의에 의한 적화를 꾀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무력적 위협으로 북한의 공산화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1946년 사실상의 공산 정권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임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토지 개혁법, 남녀 평등법, 산업 국유화법 등을 잇달아 공포, 강행하고,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함으로써 공산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침내 인민 위원회를 인민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북한의 단독 정권을 수립하였다(1948. 9. 9.). 그리고 남한의 적화를 위하여 소련과 손잡고, 그들로부터 각종 군사 원조를 받아 급속히 군사력을 강화해 갔다.

공산 집단의 남한 교란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내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교란 작전을 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들은 제주도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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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의거와 공산 폭동
반공 의거와 공산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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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 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새로이 수립된 대한 민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탄약고, 병기고를 파괴하는 한편,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활동으로 곧 진압되었다. 이러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교란 작전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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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산군 작전 지도 및 공격 명령 1호
북한 공산군 작전 지도 및 공격 명령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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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과 공산군의 격퇴

무력에 의해 남한 적화를 꾀하였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평화 공세를 펴면서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발표 등에 고무되어, 급기야는 소련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일제히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 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대한 민국 국군은, 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조국 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에 대하여 유엔은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고, 북한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 집단의 침공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등 우방 16개국의 군대가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각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마침내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수복하였으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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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들(좌)과 대동강 철교를 넘어오는 피난민들(우)
국군의 평양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들(좌)과 대동강 철교를 넘어오는 피난민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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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민족의 통일이 성취되려는 시점에서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때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였으나, 곧 다시 반격 작전을 전개하여 38도선 부근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휴전과 전후 복구

일진 일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공산군측은 유엔의 소련 대표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 같은 휴전 제의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휴전을 하게 되면 국토의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염려하여 휴전 반대 범국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 대해 통일을 열망하는 우리의 민족적 숙원을 풀어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바라는 우리 정부의 휴전 반대 열망을 무시한 채 마침내 휴전이 성립되었다(1953. 7. 27.).

세계의 자유와 평화에 중대한 도전이었던 6⋅25 전쟁은 3년간 계속되어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쟁 중에 사상자는 약 150만 명에 달하였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건물, 도로, 공장, 발전 시설 등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동시에, 남북 간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져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휴전과 동시에, 대한 민국은 황폐된 국토의 재건과 부흥을 서둘렀다. 미국 등 자유 우방도 이를 도와 주었다. 복구 사업은 국민적 참여와 열의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생산 활동도 점차 회복되어 갔다.

교통, 통신 기관이 점차 개선,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 전력 등 기간 산업 시설도 갖추어져서 경제 발전의 기틀이 잡혀 갔다.

한편,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앞으로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 협조하고 대항할 수 있는 공동의 준비를 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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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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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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