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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종교 생활과 문예 활동

(2) 종교 생활과 문예 활동

종교 생활

우리 나라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지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명문화하였다.

광복 이후, 종교계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 종교계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혁신적 방향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불교계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일대 혁신 운동을 일으켜, 승려의 자질 향상, 교육의 쇄신, 포교의 다양화 등을 추진하였다. 또, 세계 불교 연합회를 창설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지도력과 공신력을 드높였다.

한편, 일제 말에 가장 큰 시련을 겪었던 크리스트 교계는 광복 이후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교단의 분열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 개신교의 경우, 교단의 통일을 모색하면서 독재와 부정 부패 규탄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천주교는 세계적 연계성과 통일된 교구 조직을 통하여 일찍부터 정의 사회 구현에 노력하였다. 특히, 천주교계는 교황 방한, 103위 순교자의 시성 등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밖에, 민족 종교인 천도교와 대종교도 그 나름대로 교권을 확립하였고, 원불교도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종교는 광복 이후 민족의 갈망과 아픔에 동참하면서, 급변하는 사회에서 윤리적 가치관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문예 활동

광복 직후, 국토 분단과 상반된 이념의 대립으로 문화계도 양분되었다. 좌경적 색채를 띤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가 창립된 데 이어, 민족주의자들은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회를 발족시키면서 사상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 현상은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각 예술계에서도 나타나 사상적인 대립을 보였으나, 그 당시에는 좌익도 우익도 모두 민족 문화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는 야기되지 않았다. 따라서, 광복 직후의 문예계에서는 항일 독립 운동이나 민족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이 활발하였다.

6⋅25 전쟁은 문화, 예술계에 큰 수난을 가져다 주었다. 많은 문예인들이 6⋅25 전쟁의 와중에서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거나 납치되어, 현재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인사가 많다. 한편, 국군의 북진과 때를 같이 하여, 문인과 예술가들은 종군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 문예계는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들어섰다. 국립 극장 및 드라마 센터 등이 건립되고, 또 각 대학에 예술 전문 학과가 증설됨으로써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서구 문화에 대한 반성론이 대두되었고, 이에 정부는 세종 문화 회관, 문예 진흥원, 예술의 전당 등을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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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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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이르러,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사회 의식, 역사 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중의 생활 현실을 형상화한 문학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움직임은 예술계에까지 파급되어 갔다. 이러한 운동은 민중의 기본권 회복과 민족의 통일 실현을 과제로 내세웠다. 이와 아울러,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향상과 매스컴의 다양화에 따라 영화, 대중 가요 등의 대중 문화가 널리 확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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