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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조선의 건국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갔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단군 왕검(檀君王儉)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1) 단군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 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타나고 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건국의 기록은 우리 나라 건국 과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홍익 인간의 이념을 밝혀 주고 있다. 이것은 또 고려, 조선, 근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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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인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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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로까지 발전하였다고 보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2)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나 미송리식 토기 등이 나오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한편, 동이족의 분포는 고대의 한민족이라 할 수 있는 예, 맥, 부여, 고구려, 북옥저, 읍루 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이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된 속성의 하나로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단군의 기록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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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왕검
단군 왕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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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의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것도 새로운 질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진적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여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의 지배자로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즉, 각 부족 고유의 신앙 체계를 총괄하면서 주변 부족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조선은 초기에는 요령 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와서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3) 고조선의 발전과 관련하여 기자 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서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대를 B.C. 12세기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 조선을 조선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 내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또는 동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부족이 고조선의 변방에서 정치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조선은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세력이 약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3세기경에는 부왕(否王), 준왕(準王)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相), 대부(大夫), 장군(將軍)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중국의 연(燕)과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안배하여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하여 왔다. 그 중 위만(衛滿)은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처음에 준왕에게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거주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그 뒤에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위만은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4) 위만은 입국할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서 살던 조선인으로 생각된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더욱 성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예(濊)나 남방의 진(辰)이 중국 한(漢) 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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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세력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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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의 무력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완강하게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드디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313).

고조선의 사회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사회에서는 생명과 사유 재산을 중히 여기고 보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에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을 수치로 여겨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 문을 걸어 둘 필요가 없었다고 하며, 여자는 정절을 귀하게 여겼다고 하는 데에서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가 확립되었음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되어 억압과 수탈을 가하게 되자, 토착민들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되었고, 풍속도 각박해졌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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