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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 간의 경쟁과 대외 관계

삼국 간의 경쟁

삼국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서로 동맹하여 협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호간에 경쟁과 싸움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4세기까지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었는데, 이 때에는 백제가 해상으로 진출하면서 국력을 축적하여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

삼국 간의 경쟁은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제1기는 고구려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은 5세기이고, 제2기는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6세기이며, 제3기는 신라가 수⋅당과 연결하여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7세기이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은 주로 요동 지방을 비롯한 만주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남으로 몰아 내었다. 그 후,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427)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자, 나⋅제 동맹이 이루어지는 등 싸움은 보다 가열되었다.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백제, 신라 양국은 동맹 관계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였다.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는 이 시기 고구려의 세력 확장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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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
중원 고구려비(충북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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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밀어 내고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 신라는 백제가 회복한 지역을 일방적으로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120년간이나 지속되던 양국의 동맹 관계는 깨어졌다.

신라는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한편, 국력을 정복 사업에 집중시켰다.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부 지방을 확보하였으며, 그 세력이 함경도 지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한강 유역의 장악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이 신라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라는 황해를 통하여 직접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외교적인 공세까지 강화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 후 7세기에 이르러 삼국 간의 경쟁은 통일을 위한 싸움으로 전개되면서, 그 양상이 더욱 치열해졌다.

이처럼 삼국은 서로 통일을 위한 경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호간에 문물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삼국의 외교

삼국 시대에 우리 민족은 주로 중국의 침략 세력에 맞서 항쟁하였다. 특히,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던 고구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한 군현과의 대립 항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마침내는 이들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위, 전연 등의 침입으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중국 세력의 압력을 밀어 내고, 광개토 대왕 이후로는 동아시아의 대제국 건설에 성공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 중국은 여전히 분열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사정을 잘 이용한 고구려는 남북조와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교묘히 견제하였다.

한편, 백제는 북방 민족이나 중국의 북조와 자주 접촉한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한 군현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성장하였다. 또, 백제는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둥 지방에까지 진출하여1) 중국의 요서 등지에 백제 세력이 진출했다는 기록은 송서, 양서와 같은 중국의 역사책에 나타나 있다. 그 시기는 대략 4세기 후반으로 보이며, 백제의 해상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려 준다.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서, 처음에는 중국과의 교섭이 고구려나 백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일찍이 고구려를 통해 북조의 문물이 전해졌으며, 한강 유역 점령 이후에는 당항성을 쌓고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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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 통문(전북 무주)
나제 통문(전북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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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왜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나라는 백제였다. 이는, 다수의 백제 유이민이 규슈 지방 등지에 진출하여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보관 중인 칠지도라는 칼은 백제 왕이 왜왕에게 선물한 것으로서, 양국의 친교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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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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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이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왜군을 끌어들여 삼국 간의 경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이 수에 의하여 통일되자, 고구려는 그 압력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돌궐에서 고구려, 백제, 왜의 남북으로 이어지는 연합 세력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세력은 수에 부담을 주었으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수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한편,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여 수의 압력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이에, 수의 문제와 양제가 연이어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특히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으로 살수에서 수의 대군을 격파하였다(612).

수에 이어 당이 일어나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 장성을 쌓으면서 침략에 대비하였다. 더욱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독재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당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645).

당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점령하고, 이어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에서는 군⋅민 모두가 힘을 합쳐 60여 일 간이나 당군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면적인 공격의 기세를 보이자, 당 태종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 제국인 수⋅당의 침략을 잇따라 격퇴한 것은 중국과의 대결을 통한 발전의 한 모습이었으며, 아울러 백제, 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 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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