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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고대의 정치적 발전
  • (3) 삼국 통일

(3) 삼국 통일

백제⋅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백제의 압력에 시달리던 신라는 적극적인 대당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이후 재침의 기회를 엿보던 당과 손을 잡았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 하류로 침입하였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되었다(660).

백제를 멸한 후, 나⋅당 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되자, 나⋅당 연합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평양성도 함락되었다(668).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 지배층의 향락적 생활로 인해 백성들이 일체감을 상실함으로써 쇠퇴하고 있었다.

백제 멸망 이후, 각처에서 나라의 부흥을 도모하는 항전이 전개되었다. 주류성, 임존성은 당시 백제 부흥 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복신과 승려 도침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왕족 풍을 받들고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켜서 200여 성을 회복하였으며, 사비성과 웅진성을 공격하여 당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한때 강성하였던 백제의 부흥 운동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한편,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은 왕족 안승을 받들고 고구려의 유민들을 모아 한성(재령)을 근거지로 나라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며, 한때 평양의 탈환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뒤에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쳤으나,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7세기 말에 이르러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의 전통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신라의 통일

백제, 고구려가 무너지자,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다시 고구려 점령 이후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의 대당 전쟁은 백제 지역의 주둔군을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어서 고구려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도 역시 신라의 공격에 맞서 침략군을 계속 투입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는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신라는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크게 격파하여 일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도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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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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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 통일은 민속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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