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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치 조직의 정비

삼국의 정치 조직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삼국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일원적인 통치 체계를 갖추면서, 정복한 영토를 행정 구역으로 편제하여 다스렸다.

삼국의 정치 조직에 있어서 기본이 된 것은, 지위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관등 조직이었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고구려는 대대로 이하 10여 관등, 백제는 좌평 이하 16관등, 신라는 이벌찬 이하 17관등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관등에 따라 옷의 색깔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등제의 성립은 종래의 출신 부족을 대표하는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을 정점으로 하여, 그 상하 관계가 하나의 체계로 질서 있게 조직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중앙 관제는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였고, 백제는 6좌평제에 의해 행정 업무가 6개 부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비 천도 이후 새로 22부의 중앙 관서를 더 설치하였다. 신라는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기구를 설치해 나갔는데, 병부, 창부를 비롯하여 위화부, 집사부 등을 두었다. 그리고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서 이외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이 있어,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삼국 시대에는 왕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족들 간의 합의제가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신라의 화백은 상대등을 의장으로 하는 귀족들의 회의 기구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또, 중대한 국사를 논할 때에는 4영지에서 회의를 하였는데, 이러한 합좌 제도가 있었음은 당시 삼국의 정치가 국왕 중심의 귀족 정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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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금제 관식(무령왕릉)
백제의 금제 관식(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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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의 정치 조직

고대 사회의 정치 조직은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한층 정비되었다.

통일 후, 신라는 정치 구조를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재편하면서, 율령을 중시하였다. 특히, 집사부의 기능을 크게 강화하였는데, 집사부는 귀족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의 성격을 가졌으며, 국가의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를 중심으로 병부, 창부, 예작부 등 14개의 관청으로 정비되어 행정 업무가 분담되었다. 전제 왕권의 확립에 따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세력이 약화되어 간 반면, 왕권을 대변하는 집사부의 시중은 그 지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 체제는 신라의 독자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옛 관리 중의 일부는 신라의 지배 체제 안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왕권 강화와 정치 조직의 정비에 발맞추어, 유교 정치 이념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신문왕 때에 교육 기관으로서 국학이 설립된 것은 바로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인재 양성을 꾀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는 전제 왕권이 진골 귀족 세력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 관청과 행정 구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관료 조직을 재정비함으로써 집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발해에서도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관료 조직이 정비되어 갔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과,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의 6부를 골격으로 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3성은 당과는 달리,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즉, 정당성 아래에 6부를 3부씩 나누어 각각 관리를 두어 통제하도록 하였다. 특히, 국가의 중대사는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통하여 결정하였다. 한편,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기구로 중정대를 두었고, 최고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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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중앙 관제
발해의 중앙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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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지방 통치

삼국은 각기 중앙 집권적인 통치 조직을 마련하여 지방을 지배하였고, 이에 따라 행정 구역도 점차 정비하였다.

지방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성은 나중에 군(郡)으로 편성되었는데,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고구려의 5부, 백제의 5방, 신라의 5주는 이들 성을 통괄하는 큰 행정 구역이었다. 수도의 경우는 5부 혹은 6부의 행정 구역을 갖추었고, 고구려의 3경, 백제의 담로, 신라의 소경과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이 지방에 설치되었다.

남북국의 지방 통치

신라는 통일 이후 지방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성격 자체는 이전의 제도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서 그 기본은 주, 군, 현이었다. 그리하여 신문왕 때에는 9주 5소경의 지방 제도가 마련되었다.

확대된 신라의 영토는 9주로 나누어졌는데, 주에는 총관(뒤의 도독)이, 주 아래의 군현에는 태수와 현령이 각각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그리고 주⋅군에는 감찰 임무를 가진 외사정을 둠으로써 중앙 집권적 통치 조직을 강화하였다.

5소경제 역시 통일 이전의 제도를 발전시킨 것인데, 옛 삼국의 위치를 고려하여 금관경, 서원경, 남원경, 북원경, 중원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수도가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지방 통치의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통제하고, 지방 사회에 문화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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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9주 5소경
신라의 9주 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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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제도의 정비는 결국 신라가 새로 차지한 지역에 대한 통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반항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특수한 역을 부과하여 향, 부곡으로 편입하였다. 그 밖에 지방의 세력가들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서 상수리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발해의 지방 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즉, 수도인 상경을 비롯한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의 5경을 두어 행정의 원활을 기하였다.

지방 행정의 중심은 15부였으며, 62주가 그 밑에 편성되어 있었다. 부에는 도독, 그리고 주에는 자사를 파견하였으며, 주 밑에는 현을 두었다. 이들 지역에 파견되는 지방관은 고구려인으로 임명하였으나, 지방 조직의 말단인 촌락의 촌장은 말갈인으로 임명하였다.

군사 조직

고대 사회에서 군사 조직은 왕권을 강화하고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삼국은 일찍부터 군사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삼국 시대의 군사 제도는 지방 조직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아울러 국왕이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직접 군대를 이끌었던 점이 특징이었다. 특히, 지방 장관은 해당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동시에 관할함으로써 삼국은 국가 전체가 하나의 군사 조직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있었던 중요한 군사 조직은 6정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부족적인 전통을 가졌으며, 이 밖에 모병으로 구성된 서당이 있었다. 군사 조직 역시 통일 이후 전면적으로 재정비되었다. 즉, 통일 후 신라는 지방의 9주에 각 1정의 군 부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북쪽의 한주(한산주)만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2개의 정을 두었기 때문에, 10정의 부대가 지방에 분산, 주둔하였던 셈이다. 중앙군 조직인 서당은 신문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는데, 고구려인, 백제인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시켜 편성하였다.

발해는 군제를 10위로 조직하고, 각 위마다 대장군과 장군을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지방군은 농병 일치의 군사 조직이 촌락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 중앙 집권 국가의 정비된 군사 조직은 전제 왕권의 확립과 중앙 집권적 지방 통치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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