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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중세의 정치적 변천
  • (1) 정치 구조의 정비

(1) 정치 구조의 정비

태조의 정책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이후 추진한 정책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생업에 힘쓸 수 있도록 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취민 유도(取民有度)를 내세워 백성에 대한 과도한 수취를 금지하였으며, 공신과 호족들의 횡포를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또, 전란 중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백성들이 믿는 불교와 풍수 지리설을 존중하였으며, 불교와 재래의 관습을 중시하는 뜻을 보이기 위해 연등회와 팔관회 등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써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둘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즉, 태조는 통일 국가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지방 세력의 흡수와 통합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를 위해 태조는 지방의 호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우대와 감시의 차원에서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실시하였다.

셋째,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라 하였고, 국가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건국 직후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이라 중시하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켜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태조 말년에는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넓혔다.

뿐만 아니라 태조는 북진 정책 추진에 장애가 되는 세력인 거란에 강경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즉, 거란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의 뜻으로 낙타 50필을 보내 오자, 고려는 거란이 동족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사신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를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게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자주 북진 정책은 후대 왕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태조는 국가 기반을 굳건히 하고 북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자손들에게 훈요 10조를 남겨 당부하였고, 또 관리들에게 경계의 뜻으로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서 반포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건국 초부터 국가 기반의 확립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까지도 왕권은 불안정하였다. 그 이유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 출신 공신들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혜종 때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규의 난이 일어났다. 이것은 왕실과 호족 세력, 그리고 호족 출신의 외척이 서로 얽혀 일어난 정변으로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광종의 개혁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우선 주현 공부법(州縣貢賦法)을 시행하여 국가 수입의 증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후삼국의 혼란기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는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이 법을 실시한 결과,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면서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어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또, 광종은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는 종래의 무질서한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를 통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들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관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관리의 공복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후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숙청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하여 황제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건국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광종의 개혁을 기반으로 성종 때에는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지방 통치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교 정치 사상의 채택

고려 시대에 신앙 생활을 이끌어 나간 것은 불교였지만, 정치 이념을 제공하고 도덕과 윤리의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유교였다. 태조 이후 새 국가의 정치적 지도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유교 사상은 광종을 거쳐 성종 때에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성종은 즉위하자 국가의 오랜 폐단을 제거하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글을 올려 시정에 대하여 비판하고 정책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유교 사상에 입각한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을 강력히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조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비판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적 정치 사상에 입각한 정치를 추진하면서,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고, 백성들을 보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가들이 농민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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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의 시무 28조(고려사)
최승로의 시무 28조(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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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중앙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도 힘썼다. 또,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훌륭한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종은 또 중앙의 통치 기구 개편에 착수하였다. 먼저 당의 제도를 모방한 3성 6부제를 기반으로 하고,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뒤에 중추원과 삼사를 설치하고, 또 고려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설치함으로써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중앙의 통치 조직

고려의 중앙 관제는 성종 때 3성 6부, 중추원, 삼사 등의 중요 기구가 설치되었고, 그 후 점차 정비되어 문종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3성이란, 당제를 본따 만든 국가 정치의 핵심이 되는 기구로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말하는데, 고려에서는 중서성과 문하성이 통합되어 중서 문하성(내사 문하성)으로 단일 기구화되었고, 그 장관인 문하 시중이 수상이 되었다.

중서 문하성은 2품 이상의 고관인 재신과 3품 이하의 낭사(간관)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논, 결정하는 기능을 가졌다. 낭사는 간쟁과 봉박, 서경의 기능을 맡았다.

한편, 이⋅병⋅호⋅형⋅예⋅공의 6부는 상서성의 하부 기구로서 실제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아래로는 중앙의 여러 관청을 통괄하고 위로는 국왕에게 보고하는 중앙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중추원은 중서 문하성과 함께 국정을 맡은 중요 기구로서 군국 기무를 관장하는 2품 이상의 고관인 추밀과 왕명 출납의 일을 맡은 3품의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중추원과 함께 송의 제도를 본따 만든 삼사(三司)가 있었지만, 송과는 달리 단순한 회계 기관에 불과하였다.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을 합쳐 양부라 하며, 양부의 고관인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회의 기관으로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있었다.

도병마사는 처음에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다가, 뒤에는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면서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관장하는 최고 기구로 발전하였고 도당(都堂)이라고도 불렸다.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 문제를 다루던 회의 기관이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 자체의 필요에 의하여 만든 독창적 기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회의 기관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들의 잘못을 규찰하는 어사대를 설치하여 관리들의 기강을 바르게 세웠다. 어사대는 중서 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성이라고 불렸는데, 국왕을 보좌하면서 언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대성에는 관리의 임명이나 법령의 개폐시에 이를 인준하는 서경 제도가 있어서 국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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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중앙 관제
고려의 중앙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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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치 제도에서는 중앙 집권화를 위하여 국왕에게 정부 기구를 통할하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정치 권력은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는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신과 추밀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대성이 간쟁과 서경의 권한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국왕과 귀족 사이에 권력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의 행정 조직

고려의 지방 제도는 성종 때 12목이 설치된 이후 몇 차례의 변화 끝에 현종 때에 정비되었다.

고려는 군현 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루었다. 즉, 전국을 5도와 양 계로 나눈 다음 그 아래에 3경과 도호부를 비롯한 군, 현, 진 등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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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도 양 계
5도 양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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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은 풍수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개경과 서경 및 동경(경주)을 가리켰으나, 뒤에는 동경 대신에 남경(서울)으로 바꾸었다.

도호부는 군사적 방비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곳이었다.

동계와 북계의 양 계는 북방의 외침을 막기 위한 군사 행정 구역으로서, 양 계에는 병마사를 임명하였으며, 양 계의 군사적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도에는 안찰사를 두고, 그 밑에 주, 군, 현을 설치하였는데, 주와 군에는 지사,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현 밑에는 촌이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지는 않았다. 현까지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현이 더 많았다.

지방관이 파견된 현을 주현(主縣)으로 하고 그 밑에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몇 개의 속현을 예속시켜, 주현의 수령으로 하여금 속현을 관장하게 하였다. 군현에는 호장, 부호장 등의 향리가 말단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 군현과는 별도로 향, 소, 부곡과 같은 특별 행정 구역도 있었다. 향과 부곡에서는 농사를 주로 하였는 데 비하여, 소에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 은, 구리, 철 등의 원료와 종이, 먹, 도자기 등의 공납품을 만들어 바쳤다. 이들 지역은 일반 군현에 비하여 천대받았기 때문에 이 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천시되었다.

군사 조직

고려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2원적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군은 왕의 친위군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의 방어 임무를 가지는 6위로 편성하고, 상장군, 대장군 등의 무관을 두어 지휘하게 하였다. 상장군, 대장군 등은 무관들의 합좌 기관인 중방(重房)에서 군사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이는 무신 정변 이후 권력의 중추 기구가 되기도 하였다.

지방에는 주현군과 주진군이 있었다. 주현군은 대체로 자기 토지를 경작하면서 지방의 방위와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 계는 국경 지대였으므로 남쪽의 주현군과는 달리 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양 계에 배치된 주진군은 초군, 좌군, 우군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역을 담당한 상비군으로서, 그 최고 지휘관을 도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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