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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중세 사회의 발전
  • 2. 중세의 정치적 변천
  • (4) 대외 관계의 변천

(4) 대외 관계의 변천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고려 전기 외교의 기본 방향은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의 추진이었다. 그러면서도 중국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외교 정책을 신축성 있게 펴 나갔다.

고려가 건국될 무렵, 중국 북부에는 거란족이 강성하여 만리 장성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는 중국 대륙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는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태조의 이러한 북진 정책과 거란에 대한 강경 정책은 이후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송이 중국을 통일하고 거란〔遼〕과 대치하자, 광종은 송과 제휴하여 요를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따라서 거란은, 송과 친교를 맺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고려를 항상 경계하였다.

한편, 발해가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은 일찍이 고구려가 일어났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웠다. 그리고 정안국은 송과 연합하여 요를 협공하려 하였으므로 요는 고려 침공에 앞서 이 지역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였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거란의 원래 공격 목표는 송이었으나, 배후의 견제 세력을 없애기 위해 정안국과 고려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요의 성종은 먼저 정안국을 토벌한 다음,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제1차 침입은 성종 때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온 것이었다. 이 때 요가 침략해 온 구실은,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는 것과, 송과 단교한 뒤 요와 통교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의 서희는, 요가 송과 대치 상태에 있어 고려와의 전쟁에 전념할 수 없는 전략적 약점을 이용하여 소손녕과의 담판을 성공시켰다.

고려는 송과 단교하고 요와 통교할 것을 약속하는 대가로, 압록강 동쪽, 강동 6주의 관할권을 얻어 내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이로써 고려는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의 외교 관계를 끊지 않고 요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지연시키자, 요의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오니 이것이 제2차 침입이다. 이 때 강조가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양규 등이 거란의 후방에서 선전함으로써 거란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에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한 거란의 성종은 고려측이 강화를 요청해 오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아무 소득 없이 물러 갔다.

그 뒤,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이 다시 침입해 오니 이것이 제3차 침입이다. 이 때 거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협공을 받아 후퇴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1019).

거란은 그 뒤에도 자주 침입을 시도하여 국경 근처에서 충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군의 침입에 전 국민이 단결하여 용감히 싸워 이를 물리쳤기 때문에 거란은 침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역시 거란과의 오랜 전쟁에 지쳐 마침내 그들과 국교를 맺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국방을 더욱 강화하는 데 노력하여, 먼저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았다. 그리고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이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뿐만 아니라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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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와 천리 장성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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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고려는 거란족에 이어서 여진족의 압력을 받았다. 여진은 말갈이라 불리던 북방 민족의 하나로 오랫동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발해 건국 당시에는 말갈의 여러 부족이 고구려계 유민과 힘을 합쳐 당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몫을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거란의 지배로 들어간 소수의 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진족은 발해의 옛 땅에서 반독립적 상태로 있으면서 고려와 거란을 상국으로 섬겼다.

12세기 초에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마침내 정주까지 내려와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이에 숙종은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뜻밖에도 고려군은 패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기병인 여진족의 군대를 보병만으로는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 등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새로이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여진 정벌 계획은 숙종의 죽음으로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예종 때에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함경도 쪽으로 진격하여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1) 윤관은 여진족을 내쫓고 그 지역에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의 성을 쌓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책의 일환으로 사민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주 지방설과 두만강 유역설 등이 있다.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계속해서 침입해 왔기 때문에 고려는 9성을 수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이 다시는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9성의 반환을 애원해 왔다. 또, 서북쪽에는 거란 세력이 있어서, 동북쪽의 여진 토벌에만 전 국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이를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후, 여진족은 세력을 강화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한 후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요나라를 멸한 다음, 다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여 왔다.

이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금에 사대하는 외교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금에 사대하고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인종을 움직여 금의 요구를 승낙하도록 하였다.

몽고와의 접촉

최씨 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고려는 몽고의 침략으로 인하여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동아시아에는 다시 한 번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즉, 금이 쇠약한 틈을 타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데다가,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고가 금을 공격하여 만주 지역은 매우 어수선하였다.

이 무렵,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거란족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제천 방면에서 김취려에게 대패하여 물러갔다. 다음에 다시 침입해 왔으나,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북쪽으로 쫓겨가다가 강동성에서 포위당하였다.

이 때, 고려는 북쪽에서 거란족을 추격하여 온 몽고 군대와 함께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東眞國) 군대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것이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이었다.

몽고와의 전쟁

몽고는 거란족을 토벌한 후 고려에 공물을 강요하여 왔다. 그 후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 지대에서 여진족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몽고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 왔다(1231).

이 때, 몽고는 전세계를 정복할 듯한 기세였기 때문에 고려를 쉽게 점령할 것으로 여기고 침입하였다. 그러나 의주를 힘겹게 점령한 몽고군은 귀주를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굳게 지킴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 내려와 개경을 포위하였다. 아무 준비 없이 몽고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된 무신 정권은 당황하여 그간의 전황을 미처 확인할 틈도 없이 몽고의 요청대로 강화를 맺음으로써 몽고군은 물러갔다.

강화를 맺은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간섭해 오자,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에서 고려의 김윤후 부대와의 싸움에서 사살되어 몽고 군대는 쫓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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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산성(인천 강화)
강화 산성(인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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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몽고군은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그 때마다 고려인들은 끈질긴 항쟁으로 몽고의 침입을 잘 막아 내었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까지도 용감히 싸움으로써 고려군은 충주 등 여러 곳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는 극도로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또,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을 비롯하여 황룡사 9층탑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씨 정권은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두르기는커녕, 가혹한 수탈로 농촌 경제가 파탄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최의가 피살당함으로써 4대에 걸쳐 60여 년 간 이어 온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에 원종은 드디어 몽고와 화의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

개경 환도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개경 정부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하여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여⋅원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하에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제주도가 함락됨으로써 전후 4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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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성(전남 진도)
용장성(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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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 애월)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 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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