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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시련과 자주성의 회복

자주성의 시련

고려는 몽고와 강화한 이후 자주성에 많은 손상을 입게 되었다. 강화 후 고려가 최초로 받게 된 시련은 일본 정벌에 동원된 일이었다. 고려는 국호를 원으로 바꾼 몽고의 강요에 의해 일본 정벌을 위한 군대를 비롯하여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당하였다. 따라서, 오랜 전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 직전에 있었던 고려로서는 고통을 보다 심하게 겪게 되었다. 그러나 2차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인하여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는 또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다. 즉,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에는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그 후,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는 충렬왕 때에 다시 찾았으나, 쌍성 총관부는 공민왕 때에 무력으로 회복할 때까지 몽고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고려는 원의 강요에 의해서 관제도 고쳐야 하였다. 3성의 격을 낮추어 첨의부로 단일화하였고, 6부를 4사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개경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 뒤에도 존속시켜 연락 기관으로 삼았다. 이 밖에도 감찰 기관인 순마소를 두었으며, 또 다루가치를 배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은 경제적 수탈로도 나타났다. 원이 여러 가지 구실로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매 등의 특산물을 거두어 감으로써 농민들은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와 원의 관계가 확대되면서 문화와 풍속의 교류도 빈번해졌다. 고려에서는 몽고어가 사용되고 몽고식 의복과 머리가 유행하였으며, 이 밖에도 몽고식 이름을 가지는 사람들까지 나옴으로써 고려 사회의 본래 모습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의 문화가 몽고에 소개되고, 고려 풍속이 몽고 사회에서 유행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몽고의 간섭으로 고려는 각 분야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만은 굳게 지켜 나갔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14세기 후반에 공민왕은 원⋅명의 교체기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기철을 비롯한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원이 설치하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인당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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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민왕은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는 한편,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자주 정책을 쓰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추진하여 권문 세족(權門勢族)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그는 먼저, 무신 정권 이후 인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견제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권문 세족과 인연이 먼 신돈을 기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삼아 권문 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넘겨 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원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 권문 세족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원의 압력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없었고, 또 원을 배경으로 한 권문 세족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공민왕은 뜻대로 개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권문 세족의 반격으로 신돈이 제거되고 끝내는 공민왕까지 시해됨으로써 개혁 정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때 크게 진출한 신진 사대부 세력은 그 후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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