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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중세 사회의 발전
  • 3. 중세의 사회와 경제
  • (1) 중세의 사회

(1) 중세의 사회

사회 구조의 개편

고려 사회에서는 다수의 지방 호족이나 유교적 지식인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게 되어, 종래의 진골 중심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는 가문을 중시하는 문벌 귀족이 왕실과 더불어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에서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누린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또, 고려는 신분제 사회로서 가문에 따른 신분이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신분은 사회 계층을 구분하는 기본 요소가 되었다.

고려 시대의 사회 신분은 귀족과 중류층, 그리고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의 귀족은 최고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족을 정점으로 하여 문무 양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귀족층은 모든 문무 관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대체로 그들 관리 중에서도 문벌이 좋은 5품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일부 특권층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문반이 우대되고 무반은 천시되었으므로, 양반 귀족은 자연히 문반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지배층이면서도 양반 귀족에 포함되지 못하는 중류층의 하급 관리가 있었다. 중류층에는 중앙 관청의 실무 관리인 서리, 궁중 관리인 남반(南班), 지방 행정의 실무를 맡았던 향리, 그리고 하급 장교들이 있었다.

양인에는 백정(白丁) 농민과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는데, 상인과 수공업자는 농민보다 천시되었다. 이들 양인층이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국가로부터 일정한 직역을 부여받지 못한 백정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회의 최하층인 천민에는 공⋅사 노비와 함께 특수 행정 구역인 향⋅소⋅부곡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향과 부곡의 주민도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일반 양인과 다름이 없었지만,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고, 일반 농민보다 천한 대우를 받았다. 소의 주민은 수공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들 역시 천한 대우를 받았다. 이 밖에, 화척, 진척, 재인 등도 천민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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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신분 구조
고려의 신분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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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중에서도 노비는 고려 사회에서 가장 천시되었는데, 관청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에 속한 사노비로 나누어졌다.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토지와 노비는 경제적인 바탕이 되었으므로, 노비에 대한 관리는 엄격하였다. 따라서, 부모 중의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었으며, 노비를 부모로 둔 자식은 종모법에 의해 어머니 쪽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노비 중에서도 외거 노비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적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1) 외거 노비는 솔거 노비와는 달리 독립된 가계를 유지하며 토지와 가옥 등을 소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양인 농민과 거의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고려의 신분 제도는 엄격하여 조상의 신분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세습되었지만, 이와 함께 사회 계층의 변동이 부단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의 주민들이 일반 양인과 같은 지위로 승격되어 갔고, 외거 노비 중에서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문벌 귀족

고려의 문벌 귀족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음서 제도의 특전과 함께 과전, 공음전 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력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우선, 문벌 귀족들은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열망하였는데, 왕실의 외척이 되는 것은 가문의 명예일 뿐만 아니라, 권력에 접근하는 데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 가문은 경원 이씨였다. 경원 이씨는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 밖에도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등도 대표적인 문벌 귀족 가문으로 손꼽히었다. 문벌 귀족의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蔭敍)2) 문무반 5품 이상의 관리이면 그 자손이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직을 받을 수 있게 한 특수 제도인데, 조부는 물론 외조부, 장인 등의 공로에 따라서도 외손과 사위가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다.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고, 가문을 배경으로 요직에 승진하여 정치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한편,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로 인해 고려의 귀족은 개경에 집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중 죄를 짓게 되는 경우 귀향하도록 하는 형벌을 내렸는데, 이것은 고려 귀족 사회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무신 정변으로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이 몰락한 대신에 무신이 새로운 집권 세력이 되었다.

권문 세족

고려 후기 사회의 지배 세력은 권문 세족이었다. 무신 정변에 의하여 문벌 귀족이 몰락하고 무신이 집권 세력이 되었으나, 무신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권문 세족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러한 권문 세족들 중에는 고려 전기부터 그 세력을 이어 오거나, 무신 정권 시대에 대두한 가문도 있었으나, 주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경우가 많았다.

권문 세족은 고려 후기의 정치, 경제면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보수적인 사회 세력이었다. 이들은 첨의부나 밀직사 등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고려 말에 이르도록 대를 이어 집권 세력이 되었다.

권문 세족은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한 방법으로 과거보다는 음서제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학적 또는 유학적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뿐만 아니라 권문 세족들 가운데는 친원적 성향을 띠면서 원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에 폐해를 끼친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하여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신진 사대부

고려 후기에는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이 신진 사대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고 행정 실무에도 밝은 학자 출신 관료들로, 권문 세족과는 달리 그 가문이 한미한 하급 관리나 향리 집안에서 주로 배출되었다.

신진 사대부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무신 집권기부터였다. 그러나 최씨 정권에 참여한 이들은 무신들의 부족한 학문과 행정 능력을 보완해 주는 구실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신 정권이 붕괴된 후에 더욱 활발하게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감으로써, 고려 말에는 권문 세족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사회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신진 사대부들은 유교적 소양이 높았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렴과 지조를 지켜 나갈 수 있었다. 이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사전 폐지 등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수용함으로써 권문 세족의 친원적이고 친불교적인 성향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충선왕의 개혁 정치에서 한때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후 공민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권문 세족과 대항하여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에 가서는 마침내 이들이 권문 세족 중심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역성 혁명의 주체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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