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상)
  • Ⅳ. 중세 사회의 발전
  • 4. 중세 문화의 발달
  • (1) 유학과 한문학

(1) 유학과 한문학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일찍부터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여 유교주의적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광종 때에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유학에 능한 관료를 등용하였다.

성종 때는 유교 정치 사상이 정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는 최승로와 김심언이었다. 이들은 유교 사상을, 사회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치국의 근본 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유교 사상은 관념적이거나 사대적인 성격에 빠지지 않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초기의 학풍이 점차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11세기에 북진파의 대표적 인물인 왕가도가 물러난 후, 경원 이씨 일파가 집권함에 따라 자주적인 유교 정신을 강조하기보다는 집권 세력의 권력 유지만을 도모하는 보수적 성격을 띠어 갔다.

그런 가운데 고려의 유학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킨 이는 최충이었다.1) 최충의 유학은 한⋅당의 훈고학적 수준을 벗어나 상당한 철학적 내용이 가미된 것으로 송대 유학에 접근된 수준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해동 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9재 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다.

이후, 고려 중기의 유학은 비록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기는 하였지만,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하였다. 이러한 보수적 유학의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부식이었다.

이렇듯 고려 중기에 성행하였던 유학은, 무신 정변이 일어나 문벌 귀족 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다.

성리학의 전래

성리학은 원래 송의 주희가 완성한 것으로, 종래 자구의 해석에 주력하던 한⋅당의 훈고학풍에서 벗어나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원리 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신유학이었다.

성리학이 고려에 처음 소개된 것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 와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 말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도 정몽주는 ‘동방 이학의 조(祖)’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확대보기
안향
안향
팝업창 닫기

고려에 수용된 초기의 성리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주희의 소학이 중시되었다. 또, 예속을 바로잡기 위해 소학과 함께 주자가례가 권장되었다. 한편, 정도전을 비롯한 일부 성리학자들은 불교 사상 자체가 현실과는 유리된 허황한 것이라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수용으로 종래의 훈고학적인 유학은 철학적인 유학으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는 쇠퇴하고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국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서의 편찬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일찍부터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왕조 실록이 편찬되었지만, 목종 이전의 것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황주량 등이 중심이 되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완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박인량의 고금록을 비롯한 편년체의 책들이 많이 쓰여졌다.

12세기에는 김부식 등이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로 서술한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사서이다.

고려 후기에 와서도 역사 연구와 저술 활동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무신 정변 이후 사회적 혼란과 몽고 침략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에 의해,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올바론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각훈의 해동고승전, 이규보의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나 야사를 수록하여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보는 자주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사 연구의 대표적인 사서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 제왕운기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이다.

확대보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팝업창 닫기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성장과 더불어 정통 의식과 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대두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이제현은 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이 남아 있다.

확대보기
이제현
이제현
팝업창 닫기

교육 기관

고려 시대에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중앙은 물론 지방에도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특히, 성종 초에는 지방 관리의 자제들을 개경으로 불러 유학 교육을 받게 하였고, 지방 12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보내어 가르치게 하였다.

또, 성종은 중앙에 국자감(국학)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국자감 안에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같은 유학부를 비롯하여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학부를 두어 관료와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그 뒤 경사 6학을 정비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의 9재 학당 등 사학 12도가 융성함으로써 관학의 위축을 가져왔다. 이에 숙종과 예종 때에는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자감을 강화하고자 서적포를 두어 도서 출판을 활발히 하였으며, 국학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어 국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국학의 7재 속에 무학재(강예재)가 설치되어 무예의 이론과 실기를 교육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그리고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장학 재단으로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또, 청연각과 보문각이란 학문 연구소를 두어 유학의 발달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의 충렬왕 때에는 안향의 건의로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교육 재단으로 섬학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으며, 대성전을 건립하였다.

과거 제도와 음서 제도

고려 시대에는 관리 등용 제도가 교육 제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운영되었다.

고려의 과거 제도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나누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문신을 등용하기 위한 제술과는 한문학과 시무책으로, 명경과는 유교 경전 등으로 시험하였다. 그리고 기술관을 등용하기 위한 잡과는 의학, 천문학, 음양 지리 등으로 시험하였다. 그러나 무신을 등용하기 위한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에게나 응시 자격이 있었지만, 실제로 농민은 응시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리가 되는 음서 제도가 널리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가문에 기준을 둔 특별 채용 제도로서, 공신 및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손은 이에 의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음서 제도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를 강화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고려 귀족 사회의 특징적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문학의 발달

고려 전기의 문학은 삼국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광종 때의 균여는 대표적인 향가 작가였는데, 그의 전기인 균여전에는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불교의 교리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향가의 형태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광종 이후, 과거 제도가 확립되어 문치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과거에 시, 부, 경서 등이 주요 시험 과목이 되면서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문학은 귀족 사회의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고, 일상 생활에서도 유교 경전의 문구가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그 결과, 고려의 한문학은 종래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단계를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귀족 사회에서 점차 사치와 향락적인 풍조가 심해졌고, 당⋅송의 한문학을 숭상하는 경향도 일어나게 되었다. 당⋅송 문학에의 심취는 전통 문화와의 괴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귀족 문화의 사대성과 보수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대두로 새로운 경향의 문학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향가 형식을 계승한 경기체가와 어부가가 이에 속한다. 경기체가는 신진 사대부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어부가는 전원 생활의 한가로운 모습을 그려 낸 처사적 문학이었다.

확대보기
한림별곡
한림별곡
팝업창 닫기

이러한 귀족 문학과는 달리 민중 사회에서는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장가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속요라고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청산별곡, 쌍화점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서민의 감정을 대담하고 자유 분방한 형식으로 읊조린 것으로, 시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한문학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수필 문학과 설화 문학이 유행하였다. 수필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이 있었고, 설화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한시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인로는 세련된 한시를 지어 명성을 얻었고, 이규보는 장편 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종래의 한문학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하여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였다. 고려 말에는 이제현, 이곡,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의 뛰어난 한문학자가 나와 한시를 비롯한 한문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확대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규보의 동명왕편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