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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의 발달

불교 정책

삼국 시대 이래로 불교는 왕실, 귀족과 깊이 연결되어 호국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다.

고려 태조는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할 것과 연등회와 팔관회의 성대한 개최를 당부하여 불교 국가로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광종 때에는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교종선과 선종선을 두고, 급제자에게는 법계를 주어 승려의 권위를 높였다. 또,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두어 왕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귀법사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본찰로 삼으면서 분열된 종파를 수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의통과 제관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의 천태종을 부흥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즉,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었고, 제관은 천태종의 기본 교리를 정리한 천태사교의라는 명저를 저술하였다.

한편, 성종 때에는 유교 정치 사상이 강조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 등이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종 이후에는 불교가 국가의 보호를 받아 계속 융성하였으며, 현화사와 흥왕사 등 국력을 기울인 사찰이 건립되었다.

천태종의 성립

문벌 귀족 사회가 무르익던 11세기 전후에는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법상종이 화엄종과 더불어 발달함으로써 선종은 위축되었다. 이 때 화엄종 출신으로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송에 유학하고 돌아왔다. 그는 흥왕사를 화엄종의 본찰로 삼아 법상종을 비롯한 교종 불교의 사상을 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원효의 화쟁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교 사상을 통합하려 하였다.

또,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기 위해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그는 특히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다. 이후, 의천의 문하에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어 천태종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의천의 교⋅선 통합 운동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그의 통합 작업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그의 사후에 선종은 다시 독자적인 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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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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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성립

무신 정변 이후, 불교계에서는 선종의 부흥과 신앙 결사 운동의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최씨 정권이 왕실과 문신 귀족의 비호 아래 성장해 왔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탄압하는 대신에 선종 계통의 불교를 후원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거기에다 보조국사 지눌 같은 뛰어난 선승이 나와 선종을 부흥시키고 불교계를 정화하려는 신앙 결사 운동을 전개한 결과였다. 이리하여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선종과 교종의 통합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송광사에 머무르고 있던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불교 수행의 중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참선과 지혜를 아울러 닦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내세웠다. 그리고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불 독경과 함께 참선 및 노동에 힘쓰자는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개혁된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의 장점을 취하여 수행에 정진하자는 것으로, 선⋅교 통합을 지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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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국사전(전남 순천)
송광사 국사전(전남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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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은 또, 정혜쌍수와 함께 그것의 바탕이 되는 이론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이며, 점수는 깨달은 뒤에도 꾸준히 수행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눌은 의천과는 달리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과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이로써 고려 불교는 드디어 선⋅교 일치의 완성된 철학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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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
보조국사 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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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은 지눌 이후 뛰어난 계승자들에 의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유⋅불 사상의 일치설을 내세워 유교와 불교의 타협을 시도한 진각국사 혜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처럼, 조계종은 왕실 및 문신 귀족과 결탁한 세속적인 불교를 배척하는 한편, 산중 불교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개척해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심성의 도야를 강조함으로써 장차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원의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계의 혁신 운동은 단절되었으며, 이후의 불교는 다시 세속화되어 폐단이 많았다. 당시의 불교 사원은 권문 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고, 고리대업과 상업에도 손을 대어 부패가 심하였다. 이에, 고려 말의 불교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사대부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대장경의 조판

대장경이란, 경(經), 율(律), 논(論) 등 삼장(三藏)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 불교 전집이라 할 수 있다. 고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대장경의 조판이 이루어졌던 것은 고려의 불교가 호국 불교, 현세 구복 불교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초조 대장경은 현종 때 부처님의 힘을 빌려 거란을 물리치려는 염원에서 조판이 시작되어, 70여 년의 각고 끝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불교의 교리를 정리하려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 대장경은 대구 부인사에 판본이 소장되어 있던 중,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인쇄본의 일부가 남아 있다.

초조 대장경이 완성된 얼마 후에 의천이 중심이 되어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였다. 이 곳에서 국내의 것은 물론 송, 요, 일본 등에서 모아 온 대장경의 주석서인 장(章), 소(疏) 들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속장경이다. 그는 먼저 불서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작성하고, 10년에 걸쳐 4760여 권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속장경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인쇄본의 일부가 국내외에 남아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팔만 대장경도 몽고의 침입 때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만든 것이다. 고종 때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조판에 착수하여 15년 만에 완성한 팔만 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그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팔만 대장경은 그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조판이 정교한데다가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어, 동양 제일의 대장경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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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대장경 판가(해인사 장경판고)
팔만 대장경 판가(해인사 장경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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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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