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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Ⅴ. 근세 사회의 발달
  • 1. 근세 사회로의 전환
  • (2) 한국의 근세 사회

(2) 한국의 근세 사회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은 학문적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중소 지주로서 향촌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농민들로부터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신진 사대부들은 새로운 정치적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에서 사회적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와 자신들의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무인 세력과 정치적으로 협력하면서 사회의 불안과 국가적인 시련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무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공민왕 때 홍건적이 두 차례나 침입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있었다. 한편, 왜구의 침입에 따른 피해는 더욱 커서, 전국의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이 과정에서 큰 전과를 거두어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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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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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토벌이 진행되던 때, 명은 원이 직속령으로 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는 것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두고 고려 조정은 의견이 둘로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출병을 주장하였으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출병을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으나,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1388).

전제 개혁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전제 개혁을 통하여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과전법으로, 조준, 정도전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한 후, 지금까지의 토지 대장을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토지 대장을 작성하여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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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의 전제 개혁안(고려사)
조준의 전제 개혁안(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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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은 토지 수조권의 분배를 재조정하여 신진 관료들의 생활 기반을 보장하려는 제도였다. 또, 국가의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처지도 고려하여 실시한 토지 제도였다.

농민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배려로 경작권을 보호하고 조세율을 조정하였다. 이것은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국가의 조세 수입과 농민의 생활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건국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후, 권문 세족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층은 점차 고려 왕조 테두리 안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적극적인 혁명파로 갈렸다. 이 때, 다수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혁명파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문 세족과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를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1392).

새 왕조는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려 왕조의 구질서를 일신하려 하였다. 중앙 집권적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에 대한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제거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관료 체제의 기반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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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모습(수선전도)
한양의 모습(수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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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관아
광화문과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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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으로는 명과 일본에 대해서 실리 추구의 능동적 외교 관계를 설정하였다. 그것은 당시 국제 사회에 대한 정치적 안목과 명분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근세 사회의 전개

조선 왕조는 표면상으로는 고려와 유사한 왕조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큰 차이점이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왕권 중심으로 권력 구조를 바꾸고, 중앙 집권적으로 제도를 개편하여 관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비된 중앙 집권 체제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면서 모범적인 유교 정치를 추구하였다.

둘째, 사회⋅경제적으로는 양인의 수가 증가하고, 양인의 권익이 보다 신장되었을 뿐 아니라, 자영농의 수도 전보다 더 늘어났고, 농민의 경작권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과거 제도가 정비되면서 능력이 보다 존중되었다.

셋째, 문화적으로는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정신 문화와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기술 문화를 크게 진작시켜 민족 문화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사회는 고려에 비하여 보다 더 진전된 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회를 근세 사회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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