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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두 흐름

고려 말기의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역사에 대한 성찰과 현실 극복의 이념적 지표로 삼은 학문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사회 개혁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이라는 역사적 변화에 대하여,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모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즉, 개혁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적극적인 역성 혁명에 참여한 쪽과, 개혁에 소극적이면서 고려 왕조에 충성을 표시하는 의리와 명분을 주장하는 쪽의 대립이 있었다.

전자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 세력으로, 조선 왕조 성립 이후 정치 구도를 세웠으며, 유교 국가 운영에 학문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후자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으로, 조선 왕조의 건국을 반대하는 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신 간의 충성 관계를 강조하는 의리와 명분을 사회 안정의 기틀로 주장하였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 성향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정도전 계통의 유학자 관료들은 사장을 중시하였고, 정몽주 계통의 유학자들은 경학을 중시하였다.

정도전과 권근 등은 성리학을 정치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 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이들 관학파들은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15세기 중엽의 관학파들은 불교, 도교, 풍수 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면서 조선 왕조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유교 이념에 토대를 둔 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하여 주도되어, 성균관과 집현전 등을 통해서 수준 높은 근세 문화를 창조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의 개창을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정몽주, 길재 등에서 김종직, 김굉필로 그 학통이 이어지는 사림 세력이었다. 사학을 통해서 양성된 사림은 성종 때를 전후하여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일어났다.

성리학의 융성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리 철학은 대체로 향촌에서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사림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황의 학통은 김성일, 유성룡 등의 제자에 의하여 영남 학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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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이황)
성학십도(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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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 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현실 문제의 개혁을 과감히 주장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그의 학통은 조헌,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서 기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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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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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이기 철학을 성립시키고, 왕도적 정치 철학을 확립하여 정치의 활성화에 공헌하였으나,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 강병책에는 소홀하였다.

예학과 보학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 위주의 국가 질서론과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인하여 예학(禮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예학은 도덕 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 논리를 중시하였고, 명분 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림들이 신분 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 형식을 중요시함으로써, 상장 제례에 관한 예학이 발달하였다. 가정의 의례는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하였는데, 김장생, 정구 등이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면서 이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이루어졌다.

예학은 가족과 종족 상호간의 상장 제례의 의식을 바로잡고, 유교주의적 가족 제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점도 있으나, 지나치게 형식에 사로잡힌 감이 있고, 또 사림 간에 정쟁의 구실로 이용되는 폐단도 있었다.

또, 사림 양반들은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필요에서 그들은 족보를 만들어 종족의 내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것을 필수적인 교양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보학(譜學)이다.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제하는 것이 예학이라면, 보학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족보를 통해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종가와 방계를 구별하여 위계를 정하였으며, 밖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서 문벌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또, 족보는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족보의 편찬과 보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속에서 종족의 사회적 위상을 지키려는 양반들에 의해 더욱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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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록(왕실의 족보)
선원록(왕실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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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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