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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학과 예술

문학

조선 초기의 문학은 한문학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한문학은 사장을 좋아하는 문신 관료들에 의하여 발달되었는데, 이는 또한 당시 양반들의 필수적인 교양이기도 하였다.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동문선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서거정이 우리 나라의 역대 시문 중에서 뛰어난 것만을 뽑아 모은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림들이 경학에 치중하고 사장을 경시하였기 때문에 한문학은 자연히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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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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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형식은 시조, 가사, 패설, 소설 등 다양하였고, 작품의 주제도 우리 나라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연 속에 파묻힌 은둔적인 생활의 즐거움 등으로 다양하였다.

한편, 고려 후기의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하였던 설화 문학도 그대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이들 작품은 비록 한자를 빌려 썼으나, 그 내용에는 대개 우리 나라 서민 사회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역사, 전설, 풍습, 신앙 등이 담겨 있어, 민족 문학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설화를 소설 형식으로 이끌어 올린 것인데,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평양, 경주, 개성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그 후, 어숙권이 패관잡기를 지어 문벌 제도와 적서 차별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임제는 풍자적이고 우의적인 시와 산문을 써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유학자들의 사대 사상을 비판하였다.

고려 시대에 싹을 보인 시조 문학도 초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중앙의 고급 관료들의 시조로서, 여기에는 주로 새 왕조의 건설을 찬양하거나, 새 사회 건설의 희망과 정열을 토로한 것, 외적을 물리치면서 강토를 개척하는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낸 것, 농경 생활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묘사한 것들이 많았다. 패기와 자신이 넘치는 호방한 시조로서는 김종서와 남이의 작품이 뛰어났다. 다른 하나는, 유교적 충절을 읊은 시조로서, 길재와 원천석 등의 작품이 유명하였다.

이러한 시조 문학은 한글의 창제로 더욱 발전하게 되어, 우리 나라 특유의 시가로 정형화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시조는 보다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진이의 시조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을 꾸밈없이 노래하였고, 윤선도의 시조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은둔적인 생활의 즐거움을 표현하여 널리 애송되었다.

악장 문학으로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악장은 조선 초기부터 유행하더니, 훈민정음의 창제로 점차 발전하여,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사 문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작가로는 송순, 정철, 박인로 등이 뛰어났는데, 특히 정철은 풍부한 우리말의 어휘를 마음껏 구사하여 관동별곡, 사미인곡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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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
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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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운의 진전에 따라 여류 사회에서도 문인들이 나오게 되었다. 여류 문인으로는 시, 서, 화에 능한 신사임당, 한시에 뛰어난 허난설헌, 시조로 뛰어난 황진이 등이 유명하였다. 또, 민간 사회에서는 흥미 본위로 이루어진 옛날 이야기인 민담(民譚)이 전승되고 있었다.

건축

조선 시대에는 건축에서도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났다. 고려 시대의 건축은 사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는 데 비하여, 15세기에는 궁궐, 관아, 성곽, 성문, 그리고 학교 등의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다.

건물의 규모가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어서, 그 안에 거주하거나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차등을 두었다. 이것은 신분 질서를 지키려는 뜻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사치를 막자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건축은 대체로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고, 어느 건물이나 건물 자체의 균형뿐만 아니라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현존하는 것으로는, 서울의 숭례문, 창덕궁의 돈화문, 개성의 남대문, 해인사의 장경판고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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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남대문
개성의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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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물에 부속된 정원도 될 수 있는 대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살린 것이 조선 시대 정원의 특색이었다. 그러한 특색을 살린 대표적인 정원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을 들 수 있다.

16세기의 건축은 서원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 등은 서원 건축의 대표적인 것이다. 서원 건축은 주택, 사원, 정자의 건축 양식이 배합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즉, 산과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 부근의 한적한 곳에 서원을 세워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원의 가람 배치 양식을 본떠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재를 지었는데, 그 구조는 주택 양식의 도입과 유교적인 검약 정신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검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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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서원(경북 안동)
도산 서원(경북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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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공예는 상류 계층의 사치품이 아니라, 의식주의 필수품이나 사대부의 문방구 등과 관련하여 특색 있는 발달을 보았다. 따라서, 공예품의 재료도 금, 은, 구슬과 같은 보석류를 별로 쓰지 않고, 나무, 대, 흙, 왕골 등과 같은 흔한 재료를 많이 이용하였다.

주로 생활 필수품으로 만들어진 도자기 등은 견고할 뿐만 아니라, 그 형태나 색깔이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15세기에는 고려자기의 기법을 이어받아 새롭게 발전한 회청색의 분청 사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의 청자처럼 화려하고 정교하지는 못하였으나, 우아한 멋을 보였다. 분청 사기와 옹기 그릇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관수용, 민수용으로 제작, 보급되었는데, 특히 관요가 있었던 광주 분원의 것이 유명하였다.

16세기에는 세련된 백자가 널리 유행하였다. 백자는 태토가 훨씬 견고할 뿐만 아니라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서 사대부의 취향에 걸맞은 멋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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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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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롱, 문갑 같은 목공예 분야에서도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조화시켰다.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기품 있는 공예품도 만들어졌다. 이 밖에 화각 공예와 자개 그릇 공예가 발달하였다. 또, 자수와 매듭에서 양반의 부녀자들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취를 살려 훌륭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그림과 글씨

15세기의 그림은 화원과 문인들의 그림으로 나뉜다. 이 시대에는 중국의 여러 화풍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한 위에 우리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으로는 안견, 최경이 가장 유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안견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화풍을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안견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이상 세계를 그려 낸 것으로, 그 구도가 웅장하고 필치가 섬세한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문인 화가로는 강희안, 강희맹 등이 유명하였고, 신숙주는 화기(畵記)를 써서 안평 대군의 소장품을 소개하였다. 강희안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자연 속에 파묻혀 깊은 사색에 빠진 인간의 내면 세계를 그려 낸 걸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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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관수도(강희안)
고사관수도(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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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그림들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의 일본은 조선 문화의 수용에 열성적이어서, 많은 그림이 일본에 전해져 그 곳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조선의 사신들과 동행한 화원들도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많은 그림을 남기고 돌아와 일본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6세기의 그림은 15세기의 전통을 토대로 색다른 화풍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사군자에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이정, 황집중, 어몽룡은 각각 대, 포도, 매화를 잘 그려 삼절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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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매도(어몽룡)
월매도(어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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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은 동물의 모습을 잘 그렸고, 신사임당은 섬세하고 정교한 여성적인 필치로써 꽃과 나비, 오리 등을 잘 그려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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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도(신사임당)
수박도(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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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비 출신으로 전문 화원이었던 이상좌는 인물화, 산수화에 능하였는데, 그의 작품으로는 송하보월도가 유명하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자연 속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찾고, 개성 있는 화풍을 가지려는 경향도 있었다.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문인, 학자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필수적인 교양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저명한 학자들은 모두 글씨로써 일가를 이루었는데,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도 적지 않았다.

대체로 그 필법은 중국 명필가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안평 대군은 조맹부체의 글씨를 개성 있게 발전시켜 이름을 떨쳤다. 양사언과 한호는 왕희지체를 특기로 하면서, 각각 초서와 해서에 능하여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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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의 글씨
한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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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무용

음악은 국가의 각종 의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수십 종의 악기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개량되고, 악곡과 악보가 정리되어 조선의 독자적인 궁중 음악의 기초가 확립되었는데, 이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전한다. 그 뒤, 국악을 비롯한 동양 음악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악학궤범이 편찬되어 조선의 궁중 음악이 집대성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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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성현)
악학궤범(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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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세기 중엽 이후로는 음악의 주체가 궁중으로부터 서민 사회로 옮겨져 당악, 향악 등의 속악이 발달하였다. 속악으로는 가사, 시조, 가곡 외에 각 지방의 민요 등이 있어 민간에서 널리 애송되었다.

무용과 연극 중에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보존되어 내려온 것도 많았는데, 궁중에서는 나례춤, 처용무 등을, 서민층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산대놀이라는 탈춤과 꼭두각시놀이인 인형극도 민간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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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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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놀이는 바가지와 종이 등으로 만든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서, 고려 시대부터 전해 오는 것이었다. 특히, 산대놀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또, 민간에서는 굿이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무속은 촌락제, 별신굿, 가정굿 등으로 분화되어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굿과 함께 추는 춤은 탈춤, 민속무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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