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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변화
  • (1) 통치 체제의 개편

(1) 통치 체제의 개편

지배 체제의 모순

조선 왕조의 통치 질서는 16세기 중엽 이래로 해이해지더니,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한층 더 동요되어 갔다. 양반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조선 왕조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인 모순으로서, 크게 보아서 신분 제도와 토지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신분 제도의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본래 조선 사회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으로 구성된 사회로서 각 계층 간의 이동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소수의 양반층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특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다른 계층들은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양 난을 겪으면서도 지속되었다. 대외 전쟁에서 농민, 노비 등이 힘을 다하여 국난을 극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처지는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의 권위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 성리학적 가치 규범에 의해 보다 강화되어 갔다. 이에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갔다.

한편, 토지 제도에서는 양반 관료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직전법이 16세기 중엽에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토지의 사유 관념이 확산되면서 토지 소유는 양반 지주 중심으로 더욱 편중되어 갔다. 양반 지주들에 의한 토지 집적 현상은 토지 소유 관계에서 지주 전호제를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농촌 사회의 구성은 소수의 양반 지주와 토지를 잃은 소작농, 즉 전호로 전락한 다수의 농민으로 분화되어 갔다.

농민들의 경제적 고통은 부세 제도가 잘못 운영되는 속에서 보다 가중되었다. 농민들은 국가에 대하여 전세, 공납, 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부담이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징수 과정에서도 불법적 행위가 자행되어 농민들의 삶을 매우 어렵게 하였다.

농민들은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못한 채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방안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농토로부터 농민의 이탈이 심해지자, 마침내 위정자들도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농민의 이탈은 명분상으로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유교의 왕도 정치론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국가의 재정 기반을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변사의 기능 강화

집권층은 농토로부터 농민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는 속에서 현실의 변화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이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안이라도 강구해야 하였다. 이에,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양반 계층은 정치, 군사,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시도하여 나름대로 사회 변화에 대처하려 하였다.

먼저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흐트러진 통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비변사는 본래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임시 기구였다. 그러나 점차 국방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16세기 중엽에는 상설 기구가 되었다.

왜란을 겪는 속에서 비변사의 기능은 보다 강화되었다.1) 비변사는 초기에는 지변사 재상을 중심으로 수시로 군사 문제를 처리하는 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문무 고위 관리, 즉 정승, 판서, 군영 대장, 유수, 대제학 등이 모여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와 내정까지도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의정부 기능은 약화되었다. 당시 정부는 국난을 수습하기 위해서 문무 고위 관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 후 사회 혼란으로 정세가 어수선해지면서 사소한 일까지도 비변사에서 처리하였다.

5군영과 속오군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군사 제도의 개편도 역시 불가피하였다. 15세기에 정비되었던 5위제는 왜란 이전에 이미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왜란을 당하여서는 결정적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5위 제도의 불합리한 점을 깨달은 정부는 왜란 중에 용병제를 토대로 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는데, 이들 군병은 일정한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적인 상비군이었다.

훈련도감에 이어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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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수어장대(경기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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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영은 대외 관계 및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임기 응변으로 설치되었다. 특히,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의 강화라는 명분에 의해 설치되었다. 한편, 이들 군영은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즉, 인조 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붕당 정치를 내세워 남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고, 이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한편, 지방군에서는 진관을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한 조선 초기의 방어 체제가 무너지면서,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병력을 동원하는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어 있었다.2) 진관 체제는 각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여 진관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적군의 수효가 많을 때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는 각 지역의 군사를 한 곳에 집결시켜 한 사람의 지휘하에 두게 했다. 이것이 제승방량(制勝方略)의 체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왜란을 맞아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왜란 중에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의해 방위 체제를 갖추었다. 즉,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제하고, 속오법에 따라 훈련하여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신축성 있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속오군은 농한기에 훈련을 받았는데,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을 지키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도록 조직되었다.

전세 제도의 개편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가 안고 있던 모순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은 농민들이었다. 다수의 농민들은 지주 전호제가 강화되어 가는 속에서 토지를 잃고 전호로 전락하였으며,3) 조선 사회에서의 지주 전호제는 신분제와 상응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즉, 지주는 양반 관료, 토호 등 지배층이었고 전호는 피지배층으로서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민은 경제적으로 지주의 농토를 병작할 뿐 아니라 경제 외적으로 지주의 지배를 받는 노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 같은 지주제하에서 농민들이 자율적 삶을 추구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들에게 부여되는 과중한 부세는 그들을 온전히 살 수 없게 하였다.

위정자들은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그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어, 수취 체제를 다소 조정하여 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려 하였다.

먼저, 전세 제도를 개편하였다. 조선 전기의 전세는 농토의 비옥도와 그 해의 풍흉에 따라서 납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징수 방법이 매우 번잡스러워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법 자체가 무시된 채 거의 최저율의 세액이 적용되고 있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농경지가 크게 황폐화되어 농민들은 매우 궁핍해졌다. 이에 정부는 그 동안의 관행을 법제적으로 확정시켜 풍흉에 관계 없이 농토 1결마다 미곡 4두를 징수하는 영정법(永定法)을 실시하였다. 또, 부족해진 세원을 보충하기 위해 양전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인 결과 광해군 때에 54만 결에 불과하였던 전국의 농토가 인조 때에는 120만 결로, 숙종 때에는 140만 결로 증가하였다.

전세 제도의 개편으로 전세율이 종래보다 낮아진 것은 사실이나, 이는 농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전호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전세 외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부가세가 징수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때로는 종래보다 전세의 부담이 늘어났다. 즉, 전세를 납부할 때 여러 가지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 자연 소모에 대한 보충비 등이 함께 부과되었는데, 그 액수가 전세액 자체보다 훨씬 많아 실제 납부액은 법정 세액의 몇 배가 되기도 하였다.

공납 제도의 개편

공납은 본래부터 농민들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16세기 이래로 방납(防納)이란 관행이 심해져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농민의 유망은 더욱 심해졌고, 그러한 상황은 정부의 재정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었으며, 오랜 논의 끝에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이란, 민호(民戶)에 부과하던 토산물을 농토의 결 수에 따라 미곡, 포목, 전화(동전)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정부는 수납한 미곡, 포목, 전화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그들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썼다.

대동법의 실시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당 미곡 12두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과중했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또 토지를 가지지 못한 소작농은 일단 과세의 부담에서 벗어났으므로 농촌 경제는 일시적으로나마 안정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물품의 조달을 위해 공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각 지방에 장시가 발달하였고, 생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경제 질서가 자급 자족의 상태에서 유통 경제로 바뀌어 갔다.

그러한 속에서 상인 자본의 규모가 커져서 도고 상업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즉, 대동법의 실시는 상품 화폐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농민들을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시켰고, 궁극적으로는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시켰다.

한편, 시일이 지나면서 농민들은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농민들은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왕실에 상납하는 진상이나 별공을 여전히 부담하였고, 지방 관청에서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특산물을 징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지를 가진 지주에게 부과되던 대동세가 토지를 가지지 못한 소작농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행정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수령 및 아전들의 농민 수탈이 다시 가혹해져 갔다.4) 대동법은 지방 재정을 마련해 주는 기능도 있었다. 즉, 징수된 대동세의 일부를 지방에 유치하여 지방 관아의 경비로 쓰게 하였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유치미의 비율이 낮아졌다. 이는 지방 관아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나아가 아전으로 하여금 농민을 수탈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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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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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역 제도의 개편

군역 제도의 모순도 농민들을 힘들게 하였다. 조선 후기 농민 장정은 1년에 2필의 군포를 납부해야 하였다. 그런데 군포의 징수는 단일 관청에 의해 통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군적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농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여기에 군포 수납 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수령, 아전들의 농간까지 겹쳐 인징, 족징, 백골 징포 등의 여러 폐단이 생겨났다.

군역의 폐단이 심해지면서 농민들은 유망이나 피역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폐단을 시정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정부는 줄어든 군포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결작으로 토지 1결마다 2두의 쌀을 부과하였고, 어장세, 염전세, 선박세를 국고 수입으로 돌렸다. 그리고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일부 상류 신분층에게도 군포를 부담시켰다.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의 부담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한때 농민의 부담은 가벼워진 듯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농에게 전가되고, 군적이 문란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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