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변화
  • (4) 대외 관계의 변화

(4) 대외 관계의 변화

청과의 관계

호란 이후, 조선의 청에 대한 적개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여 북벌 정책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외교적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문물이 융성하였다. 조선의 사신 일행은 청에 다녀온 후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이러한 사정을 전하였고,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 때 천리경, 자명종, 화포, 만국 지도 등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조선 학자 중에는 청을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을 펴는 학자도 있었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조선에 대하여 백두산 일대의 경계를 명백히 하자는 교섭을 해 왔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간도 지방에 정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를 청에서 문제시한 것이다.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는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다(1712). 정계비에 의하면,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두 나라 사이의 경계선이었다.1) 정계비는 백두산 산정에서 동남쪽 약 4km, 해발 2,200m 지점에 세워졌다. 그 비문에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정계비는 후에 그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 사이에 간도의 귀속 문제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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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백두산 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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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따라서, 일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전란 후 성립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교섭을 허용하여 줄 것을 조선에 간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을 탓하면서도, 국초 이래의 교린 정책의 원칙에 맞추어 제한된 범위 안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기유약조). 그리하여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쌀, 무명, 인삼 등을 구하여 갔다.

또, 일본은 조선을 문화의 선진국으로 여겨 사절을 파견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는데, 그 일행이 400여 명이나 되었으며, 국빈으로 대우를 받았다.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통해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애를 썼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구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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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의 행로
통신사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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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도
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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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해상의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로 우리 나라 영토였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이 자주 이곳을 침범하자, 숙종 때 동래의 어민인 안용복이 일본 어민들을 울릉도로부터 축출하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 정부에서는 울릉도 개척을 위해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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