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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상과 학문의 동향

(1) 사상과 학문의 동향

성리학적 질서의 강화

양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에서도 지배층은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중앙에서는 붕당 정치를 통하여 지배층의 결속을 꾀하면서, 향촌에서는 유교적인 향약을 강요하여 지배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지배층인 양반들이 내세운 사회의 가치 규범은 성리학적 질서였다. 성리학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는 충효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즉, 성리학에서는 명분론(名分論)을 내세워, 그 직분이나 신분에서 분에 넘치는 행위는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 명분론이란, 사람은 모두가 자신의 사회적 분수, 즉 명분이 있다 하여 양반과 상민,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이 같은 명분론을 사회 질서의 기본 이론으로 내세워 지배 질서의 편성에 우선적으로 적용하였다. 따라서, 지배 계층의 정통성과 봉건적 질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리학적 질서하에서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주인과 노비, 그리고 양반과 상민 사이의 종적인 지배 예속 관계가 절대시되었고, 그러한 관계를 밝히고 있는 삼강 오륜의 가르침이 기본 덕목으로 중요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는 지배 체제가 동요하고 있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더 강조되었다. 지배층은 성리학적인 질서를 강화하여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사태를 보다 악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사회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론적 바탕이었던 성리학은 이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리학계에 대하여 비판적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리학계에서는 비판적 견해나 주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배척하는 등 사상적 경직성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연구는 정국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진행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이 지배층의 이론적 도구였고 사상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17세기의 붕당들은 그들의 붕당이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 학연에 유의하면서 학문적 토대를 굳히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영남 학파가 주로 동인 계열을, 기호 학파가 주로 서인 계열을 이끌었다.

당초에는 동인이 정국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영남 학파가 정계에 많이 진출하였고, 그들의 학문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동인은 곧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처음에는 유성룡 등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 계열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북인 계열은 대체로 영남 학파 중에서도 조식의 학통을 이었으며, 특히 절의를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정인홍,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편, 남인 계열은 이황의 학통을 내세웠는데, 정계에서보다는 향촌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컸다.

서인에 의해 인조 반정이 단행되고, 그들에 의해서 정국이 주도되면서, 이후에는 기호 학파가 위세를 떨쳤다. 서인은 장기간 집권하였는데, 숙종 때에 이르러 분파되었다. 정책의 수립과 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보수와 혁신, 강경과 온건 등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생겨났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은 이이의 학풍을 정통으로 이었다고 자부하였다. 이에 대해서,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은 성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황의 학설에도 호의를 보이는 반면, 이이에 대하여는 비판적이기도 하여 성리학의 이해에 탄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소론은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배격한 윤휴의 학설을 두둔하였는가 하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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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 서원 사당(경기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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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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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이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면서 한동안 주기론이 우세하였으나, 그 안에서 다시 분파가 생겨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주기론을 획일적으로 고집하는 충청도 지방의 노론과, 주리론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서울 지방의 노론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 이래로 정국에서 거의 배제된 남인 계열의 영남 학파는 향촌에서 학문의 본원적인 연구에 힘써 이황의 학설을 보다 심화시켰다.

양명학의 수용

노론의 일당 전제화로 정국이 경직되면서 성리학도 지나치게 보수적 성향을 띠어 갔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 체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는데, 17세기 후반의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해서 주자와 다른 해석을 내려 당시 학계에서 유학의 반역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윤휴와 같은 시기에 박세당도 주자학을 비판하다가 학계에서 배척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동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지행 합일(知行合一)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사상 체계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그 의미가 새로이 인식되었다.2) 양명학에서는 모든 인간은 양지(良知)라고 불리는 선험적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양지는 사물을 바로 인식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하였다. 양명학에서는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그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하여,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명학은 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재야의 소론 계열 학자와 불우한 종친 출신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다. 16세기 말부터 양명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양명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 정제두가 양명학에 깊은 이해를 보이면서부터였다.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존언, 만물일체설 등을 써서 양명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의 영향하에 이른바 강화 학파라 불리는 양명학자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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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학파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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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연구의 확대

성리학에 대한 반발은 국학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본래 성리학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학문이었으므로, 여기에 심취한 성리학자들은 우리 문화를 중국 문화의 일부로만 인식하였다. 더구나 성리학이 사회 변화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실학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우리의 역사, 강토, 언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먼저, 실학자들은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익은 체계적인 역사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한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종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한편,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외국 자료까지 인용하면서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서술로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였다. 또, 이종휘와 유득공은 각각 고구려사와 발해사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는데,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시간성에 대한 관심이 국사의 연구로 나타났다면, 공간성에 대한 관심은 국토의 연구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새로운 지도가 제작되었다.3) 국토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축적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도와 지리지가 제작, 편찬되었다. 이 시기에 편찬된 지리서로는 유형원의 여지지, 이중환의 택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택리지에는 우리 나라 각 지방의 자연 환경과 인물, 풍속, 인심의 특색 등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지도 제작에는 정상기와 김정호의 업적이 뛰어났는데, 전자는 동국지도를, 후자는 청구도,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그 이전의 지도 제작은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이 주가 되었으나, 이 시기의 지도에는 산업,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과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진 점에 특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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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전도
대동여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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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의 언어, 즉 한글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여, 음운학과 어휘의 수집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음운에 관한 연구 성과로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이 유명하고, 어휘 수집에 관한 것으로는 이성지의 재물보,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다. 이들 연구의 성과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 즉 문화적 자아 의식을 크게 높여 주었다.

문화 인식이 넓어짐에 따라서 백과 사전의 성격을 띤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일찍이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문화의 각 영역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18, 19세기에는 이러한 학풍이 한층 더 발전하여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편찬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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