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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 사회의 전개
  •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2)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2)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농민층의 동요

개항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 경쟁은 갑신정변 후에 더욱 가열되었다. 청국과 일본 간의 침략적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다.1) 갑신정변은 국제 사회에 한반도의 위치를 새롭게 인식시켰다.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함께 갑신정변은 조선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 러시아의 한반도 침투에 대항하여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함으로써(1885),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인 부들러(Budler)는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를 조선 정부에 건의하였고, 또 유길준도 열강이 보장하는 한반도의 중립론을 구상하였다. 이와 같은 중립론은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긴박한 사정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의 침략에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 채 타협과 굴복을 일삼음으로써,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국가 재정은 개항 이후 국제적 분쟁으로 인한 배상금 지불과 근대 문물의 수용에 필요한 경비 지출 등으로 더욱 궁핍해졌고,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압제와 수탈도 심해졌다.

한편, 조선의 농촌 경제는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피폐해져 갔다. 개항 이후, 조선에 가장 먼저 침략의 손을 뻗친 일본 세력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하여 청국에 밀려 크게 약화되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청국보다 강세를 유지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처음에는 청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영국의 면제품 등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파는 중계 무역을 하였으나, 점차 자국 제품으로 대치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당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수출품은 미곡이 3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일본 정부의 정치적 비호를 받은 일본 상인들은 조선 농민의 가난한 형편을 이용하여, 입도 선매(立稻先賣)나 고리대의 방법으로 곡물을 사들여 폭리를 취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여,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곡물의 수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항의로 배상금만 물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농촌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농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커 갔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착취로 인하여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해 갔다. 그리고 농촌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정치⋅사회 의식이 급성장하여 사회 변혁의 욕구도 고조되었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包接制)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 형태의 농민 운동은 조직적인 농민 전쟁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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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교세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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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군의 봉기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자, 동학 교도들은 삼례와 보은 등지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교조 신원 운동을 벌여 동학을 공인받으려 하였다. 특히, 보은 집회는 동학 교도와 농민이 참가한 대규모의 집회로 발전하여,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더니,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동학 농민 운동은 대체로 네 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기는 고부 민란의 시기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전봉준이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뒤,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1894).

제2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절정기로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이 보국 안민(補國安民)과 제폭 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정읍, 고창, 함평, 장성 등을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

폐정 개혁 12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奴婢文書)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涼笠〕은 없앤다.

7. 청상 과부(靑孀寡婦)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오지영의 ‘동학사’〉

제3기는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그들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시기이다. 전주 화약이 맺어졌으나,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4기는,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동학 농민군이 다시 일어난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으며,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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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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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의 성격

동학 농민 운동은, 안으로는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였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한, 반봉건적⋅반침략적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반봉건적 성격과 반침략적 성격 때문에,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을 동시에 받아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반봉건적 성격은 갑오개혁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쳐 전통 질서의 붕괴를 촉진하였으며, 반침략적 성격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 운동에 가담함으로써 구국 무장 투쟁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근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성을 지녔으며,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 침략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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