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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 사회의 전개
  •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3) 근대적 개혁의 추진

(3) 근대적 개혁의 추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조선은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근대적인 개혁을 주체적으로 실시할 기회를 잃었으나, 개항 이래로 누적된 여러 가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국왕은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던 온건 개화파들도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으므로, 국왕의 명을 받아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1) 일본 정부가 조선에 내정 개혁안을 제출했을 때, 조선 정부는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우선 문제로 내세웠으며, 1894년 6월 왕명으로 교정청을 설치하고, 당상(堂上) 15명과 낭청(郞廳) 2명을 임명하여 자주적으로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다.

한편,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들어왔으나, 이미 정부와 동학 농민군 사이에는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외국 군대의 조선 주둔에 대한 명분은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내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적인 의도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의 명분을 찾고, 나아가서 청과의 전쟁 구실을 만들어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친 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 탈취와 함께 침략의 기반을 닦으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내정 개혁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일본군이 먼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측의 내정 개혁 강요와 조선측의 자주적 개혁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위협 속에 민씨 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초정부적인 회의 기관으로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것이 제1차 개혁으로서, 이른바 갑오개혁이다(1894). 당시, 일본은 이권 침탈에 힘쓰고, 개혁 내용에 대해서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개혁은 사실상 군국기무처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게 되자, 조선에 대하여 적극적인 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이 때, 갑신정변의 주동자로서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하여 개혁에 참여하였다.

제2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면서 추진되었다. 고종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독립 서고문(獨立誓告文)을 바치고,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독립 서고문은 국왕이 나라의 자주 독립을 선포한 일종의 독립 선언문이었으며, 홍범 14조는 자주권, 행정, 재정, 교육, 관리 임용, 민권 보장의 내용을 규정한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이었다. 제2차 개혁은, 당시 일본이 삼국 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내무 대신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민씨 일파에 의해 제거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典範)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宗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議政府) 및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아니한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의 관할에 속한다.

8.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9.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 회계를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 기예를 견습시킨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박영효가 실각한 뒤,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1895). 이러한 가운데, 제3차 개혁이 추진되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로 반발하였다. 마침내, 명성 황후의 시해로 울분에 싸여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이 단발령을 계기로 하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친러파는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이 아관 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하여 개혁 운동은 중단되었다.

개혁의 내용과 의미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통하여 정치⋅경제⋅사회의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정치면에서는,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하여 정치의 실권을 상당 부분 내각이 가지도록 함으로써 국왕의 전제권을 제한하였다. 또,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시켜 체포와 구금, 재판의 업무는 경찰관과 사법관만이 맡도록 하였다. 한편, 지방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하고 행정권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에 관한 모든 사무를 탁지부가 관장하도록 하여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왕실과 정부의 재정을 분리하여 국가 재정을 정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제를 시행하였으며, 도량형을 개정, 통일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신분제를 철폐하여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였고, 공사 노비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인신 매매 행위를 금지하였다. 또, 조혼 금지, 과부 개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등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였다.

군사면에서의 개혁은 소홀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의 군사력 강화나 군제 개혁을 꺼린 때문이었다. 개혁 과정에서 훈련대의 창설, 확충과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 한때 시도되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갑오⋅을미개혁은 대체로 일본 제국주의의 세력에 의하여 강요된 면도 있으나, 봉건적인 전통 질서를 타파하는 근대적 개혁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아가, 조선의 개화 인사들과 동학 농민층의 개혁 의지가 반영된, 민족의 내부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노력이기도 하였다.2) 갑오개혁, 을미개혁은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착수되었고, 그 결과도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체제 개편에 불과했다고 하는 개혁의 타율성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의 개혁 강요가 있기 이전에 이미 갑신정변이나 동학 농민 운동에 의하여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갑오개혁, 을미개혁이 사실상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며, 개혁의 결과도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일대 개혁이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나마 그 개혁의 자율성이 인정되고, 개혁의 방향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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