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Ⅱ. 근대 사회의 전개
  •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4) 독립 협회 활동과 대한 제국

(4) 독립 협회 활동과 대한 제국

독립 협회의 창립과 민중 계몽

아관 파천에 의하여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어,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고,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시기에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여,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 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확대보기
독립 신문과 서재필
독립 신문과 서재필
팝업창 닫기

독립 협회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도부를 형성하였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보수적 지배층의 압제에 불만을 가진 도시 시민층이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학생, 노동자, 여성, 천민 등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독립 협회의 지도층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같은 개혁 운동이 민중의 지지 기반이 없어 실패로 끝난 사실을 거울삼아, 우선적으로 민중을 일깨우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강연회와 토론회의 개최, 신문과 잡지의 발간 등을 통하여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민중을 계도하였다. 이러한 계몽 운동에 의하여 점차 국민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향상되고,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도가 높아져서 독립 협회는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독립 협회와 독립 신문이 정부의 외세 의존적인 자세를 비판하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관료들은 대부분 이탈하였지만, 독립 협회는 오히려 민중에 기반을 둔 사회 단체로 발전되어 갔다.

국권⋅민권 운동의 전개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고,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확대보기
만민 공동회(민족 기록화)
만민 공동회(민족 기록화)
팝업창 닫기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독립 협회는 국민의 신체 자유, 재산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확보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고,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나아가,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그러나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에 서울 시민들은 만민 공동회를 열어 50여 일 간의 시위 농성을 통하여 독립 협회의 부활, 개혁파 내각의 수립, 의회식 중추원의 설치 등을 요구하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독립 협회 활동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은 자주 국권 사상,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으로 집약된다.

첫째, 자주 국권 사상은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자주 독립하는 길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민중을 배경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열강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를 물리치는 등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자유 민권 사상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 및 국민 주권의 확립을 통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민중에게 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유 민권의 민주주의 이념을 사회 일반에 전파하였다.

셋째, 자강 개혁 사상은 자주적인 근대 개혁을 통하여 국력을 배양하려는 근대화 사상이었다. 독립 협회는 과거의 개화 세력과는 달리,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제국

아관 파천 1년 만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확대보기
황궁우(서울 중구)
황궁우(서울 중구)
팝업창 닫기

대한 제국은, 안으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인 자각과, 밖으로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독점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성립되었다.

대한 제국의 집권층은 갑오⋅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다. 광무 정권의 시정 방향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 신참(舊本新參)에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복고주의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광무 정권의 복고적 정책은 정치면에서 전제 왕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광무 정권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광무 정권이 1899년에 일종의 헌법으로 제정한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 제국이 전제 정치 국가이며,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고,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등을 모두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여 전제 군주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대한국 국제(요약)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 독립 제국이다.

제2조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 등을 명한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를 정하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한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 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

한편, 광무 정권은 경제면에서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양전 사업은 과거의 누적된 폐단의 하나인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양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地契)가 발급되었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각종의 실업 학교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교통, 통신, 전기, 의료 등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어 갔다.

이와 같이, 광무 정권은 경제, 교육, 시설면에서 국력 증강을 꾀하였으나,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간도와 독도

19세기 후반 이후, 한민족은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 곳 황무지를 개척하는 등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자 청은 간도 개간 사업을 구실로 한민족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이므로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간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도 일제는 간도에 통감부의 파출소를 두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1909), 만주의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받아 내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일제가 이와 같이 우리의 외교권을 장악하여 제멋대로 협약을 체결한 것은 을사조약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을사조약이 고종 황제에 의해 무효임이 선언된 이상, 이 조약을 근거로 맺은 간도 협약도 무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