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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5)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5)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항일 의병 운동의 시작

청⋅일 전쟁 이후 한반도의 지배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던 일본과 러시아는 마침내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전후하여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한 제국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여러 방면에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민족적 저항은 의병 전쟁이었다.

최초의 항일 의병은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친일 내각에 의해 강행된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중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을미의병은 위정 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전국 각지로 군사 활동을 확대하여, 충주를 비롯한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고, 친일 관리와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을미의병의 투쟁은, 아관 파천을 계기로 친일 정권이 무너지면서 단발령이 철회되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대부분 종식되었다. 이 때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의병 항전의 확대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침략을 적극화하면서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의 체결을 발표하였다. 이에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조병세, 이상설, 안병찬 등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의 폐기를 황제에게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고, 민영환 등은 외교권 상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로써 을사조약에 항거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또, 장지연 같은 이는 격렬한 항일 언론을 펴 일제를 규탄하고 민족적 항쟁을 호소하였다.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다시 봉기한 의병들은 조약의 폐기와 친일 내각의 타도를 내세우고 격렬한 무장 항전을 벌였다. 먼저, 민종식은 을사조약이 발표된 뒤에 관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맞섰다. 그리고 최익현은 의병을 이끌고 순창에 입성하여 관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 하겠다고 하여 싸움을 중단하고 포로가 되었는데, 결국 일본군에 의하여 쓰시마 섬에 끌려가서 순절하였다.

한편, 평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은 의병을 모아 영해에 입성하여 관군의 무기를 탈취한 후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의병의 수는 한 때 3천 명을 넘었다. 종래의 의병장은 대체로 유생들이었는데, 이 때부터는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동이 두드러져서 의병 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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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장이 간직했던 태극기
한말 의병장이 간직했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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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쟁의 전개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의 구국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1907).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발점으로 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였던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의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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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의 시위대
대한 제국의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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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의병 조직과 활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만강 건너 간도와 연해주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전국의 의병 부대가 서울 진공을 위한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인영과 허위가 지휘하는 1만여 명의 의병 연합 부대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그 선발대가 서울 근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이 심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홍범도와 이범윤이 지휘하는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의병 부대가 국내 진공 작전을 꾀하였으며, 의병으로 활약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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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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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전쟁은, 그 뒤 일본군의 잔인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많은 의병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로 옮겨 가 독립군이 되어 계속 일제에 강력한 항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부 의병들은 국내에 남아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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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궐기
의병의 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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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전쟁의 의의

의병 전쟁은 전국을 활동 범위로 하고, 광범한 사회 계층을 망라하였으나, 우세한 무기를 보유한 막강한 일본의 정규군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봉건적 지배 질서의 유지를 고집하는 양반 유생층의 지도 노선으로 인하여 결속이 강화되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요된 후에는 외교권이 상실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국제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의병 전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의병 전쟁은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인 형태였고,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아가, 의병 전쟁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 전쟁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사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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