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Ⅱ. 근대 사회의 전개
  •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1) 개항 이후 열강에 의한 경제 침탈

(1) 개항 이후 열강에 의한 경제 침탈

일본 상인의 무역 독점

외국의 상품은 개항 이전부터 청을 통하여 국내에 유입되었으나,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면서 아무런 제한 없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외국 상품은, 아직 근대적 생산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던 국내의 산업계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확대보기
1900년 무렵의 인천항
1900년 무렵의 인천항
팝업창 닫기

개항 초기에는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에서 10리 이내로 제한되어, 조선 상인을 매개로 한 거류지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이 시기의 일본 상인들은 대부분 쓰시마 섬과 규슈 지방 출신으로, 몰락 상인과 불평 무사층이 많았다. 이들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형적인 모험 상인들로서, 일본의 영사 재판권, 일본 화폐의 사용권, 일본의 수출입 상품의 무관세 등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약탈적인 무역 활동을 일삼았다.

이들 일본 상인들은 주로 영국의 면직물을 상하이 등지에서 매입하여 조선에 판매하고, 조선에서 곡물, 귀금속 등을 반출해 가는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청국 상인들이 대거 침투하여 조선 시장에서 일본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880년대에 일본 상인들은 농촌에까지 활동 무대를 넓혀 갔고 곡물 수매에 주력하였다. 당시,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과정에 있던 일본은, 농촌의 피폐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곡물을 대량 수입해 감으로써, 조선 내에 곡물 가격의 폭등 현상을 일으켜 도시 빈민층과 빈농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 이에, 곡물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경도와 황해도에서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외국 상인들의 내륙 시장 침투로 인하여 종래 수입 상품의 내륙 판매를 담당하던 조선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서울 상인들은 철시(撤市)로써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항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조선 상인의 반발 및 청국 상인과의 경쟁을 모두 물리치고 조선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

청⋅일 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열강의 경제적 침탈은 한층 더 강화되어, 이권 탈취, 금융 지배, 차관 제공 등의 양상을 띤 제국주의적 경제 침탈 단계에 들어섰다. 열강의 이권 탈취는 아관 파천 시기부터 두드러져,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은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등 이권을 빼앗아 갔다.

확대보기
열강의 이권 침탈
열강의 이권 침탈
팝업창 닫기

외국 금융 기관의 조선 침투는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은행은 은행 업무 외에 세관 업무, 화폐 정리 업무 등을 장악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다는 화폐 정리를 주도하여, 국내의 중소 상공업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차관 제공도 그 침략 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적극성을 띠었다. 청⋅일 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시작한 일본은 조선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틈타서 내정 간섭과 이권 획득을 목적으로 차관을 제의하여 실현시켰다. 그리고 러⋅일 전쟁 이후에는 대한 제국의 화폐 정리와 시설 개선의 명목으로 차관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차관 제공 정책은 대한 제국을 재정적으로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려는 것이었다.

일본의 토지 약탈

개항 직후에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 안의 일부 토지를 빌려 쓰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들은 활동 범위가 개항장 밖으로 확대됨에 따라, 곡물을 사들이기 위해 조선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농토를 대신 차압하기도 하고, 농토를 저당잡고 고리 대금업을 하다가 그것을 빼앗기도 하여 점차 토지 소유를 확대해 갔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자, 일본의 대자본가들이 대거 침투하여 전주, 군산, 나주 일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에 의한 대규모의 토지 약탈은 러⋅일 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철도 부지와 군용지의 확보를 구실로 토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경인선과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철도 부지 중 국유지는 약탈하였고, 사유지는 조선 정부가 소유자로부터 사들여 제공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용지에 필요한 지역을 거의 제한 없이 차지하였고, 군용지를 핑계로 주둔지 근처의 토지를 대량으로 약탈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은 조선의 황무지 개간과 역둔토(驛屯土)의 수용에 의하여 토지 약탈을 꾀하였다. 국권을 빼앗길 무렵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소유한 토지는 무려 1억 5천만 평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일본이 막대한 토지를 약탈한 것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확대보기
일제의 토지 측량
일제의 토지 측량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