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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

경제적 침탈 저지 운동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여 여러 측면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방곡령의 시행, 서울 상인들의 상권 수호 운동,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보안회 등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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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주권 수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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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방곡령의 시행은 일본 상인들의 농촌 시장 침투와 지나친 곡물 반출을 막기 위하여 내린 조치였다. 조선에서 방곡령은 흉년이 들면 지방관의 직권으로 실시할 수 있었다.

개항 이후, 곡물의 일본 유출이 늘어나면서 곡물 가격의 폭등 현상이 나타났고, 흉년이 겹쳐 함경도, 황해도 등지의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일본 측이 트집을 잡음으로써 방곡령은 외교 문제로 번졌다. 일복측은, 방곡령을 실시하기 1개월 전에 조선측이 일본측에 통고해야 한다는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을 구실로 조선측을 강압하여 결국 방곡령을 철회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일본 상인들은 방곡령으로 인하여 손해를 입었다고 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둘째로, 서울 상인들은 청국과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반대하여 상권 수호 운동을 벌였다.

개항 초기에는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10리 내로 제한되었으나, 1880년대에는 개항장 100리까지 확대되어, 서울을 비롯한 조선 각지에서 청국 상인과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경쟁이 치열해졌다. 서울의 경우, 청국 상인들은 남대문로와 수표교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은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도심을 향하여 조선의 상권을 잠식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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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의 일본인 거류 지역(1910)
부산 초량의 일본인 거류 지역(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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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발하여 수천 명의 서울 상인들은 철시하고 외국 상점들의 서울 퇴거를 요구하였으며, 그 뒤에도 철시한 서울 상인들과 시민 수천 명이 1주일 동안 격렬하게 상권 수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서울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외국인의 불법적인 내륙 상업 활동을 엄단할 것을 요구하며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셋째로, 독립 협회는 열강의 이권 탈취에 저항하여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러시아가 일본의 선례에 따라 저탄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또, 한국의 화폐 발행권과 국고 출납권 등 각종의 이권 획득을 목적으로 서울에 설치된 러시아의 한러 은행도 폐쇄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 기지 설치를 위한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진남포) 부근의 도서에 대한 매도 요구를 강력히 저지시키고, 프랑스, 독일 등의 이권 요구도 좌절시켰다.

넷째로,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일제의 토지 약탈 음모를 분쇄하였다. 즉, 일제가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면서 일본인에게 막대한 황무지의 개간권을 주도록 요구하자, 국민들은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 민간 실업인과 관리들은 농광 회사를 설립하여 황무지를 우리 손으로 개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보안회는 매일 가두 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적 요구를 규탄하면서 거족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안회는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마침내 일제로 하여금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게 하였다.

다섯째로,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에,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를 중심으로 각종 애국 계몽 단체와 언론 기관이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모금을 위해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까지 내어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간교한 탄압으로 이 거족적인 경제적 구국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근대적 상업 자본의 성장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적 요소가 싹트고 있었으나, 미처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문호가 개방되었다. 문호 개방 이후, 외국 자본주의의 침탈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근대 경제를 건설하려는 움직임도 지속되었다.

개항 이전에 일부 형성되었던 상업 자본은 외국 자본주의와 침략 앞에서 여러 가지로 변모해 갔다. 서울의 시전 상인은 특권 상인으로서 전통적인 상업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외국 상인들이 도시로 침투해 옴에 따라 그들과의 항쟁 과정에서 근대적 상인으로 변모해 갔다. 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독립 협회와 더불어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고, 근대적 생산 공장의 경영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경강 상인은 개항 후 정부의 세곡 운반이 일본인의 증기선에 독점되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그들도 증기선을 구입하여 일본 상인에 대항하려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개성 상인의 인삼 재배업도 일본인의 약탈에 의하여 침해당하였다. 토착 상인 가운데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은 개항 이후에 크게 활기를 띠었다. 문호 개방 초기에는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에 한정되었으므로, 이들은 외국 상품을 개항장과 내륙 시장을 연결, 유통시켜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외국 상인의 내륙 상업이 허용됨에 따라 이들 상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자본 축적에 성공한 일부 상인들은 상회사(商會社)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로 외국 상인의 침투, 무역 확대 과정에서 일정한 상업 자본의 성장, 그리고 개화 사상가들에 의한 외국 회사 제도의 소개 등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1880년대 초기부터 대동 상회, 장통 회사 등의 상회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에는 회사 수가 전국 각지에 40여 개에 달하였다. 초기의 회사는 대부분 동업자 조합의 성격을 띤 상회사였으나, 점차 근대적 형태의 주식 회사도 설립되었다.

1890년대 후반기에는 정부의 상공업 진흥 정책에 맞추어 내국인의 기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문호 개방 이후,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에 들어와 대규모의 운수 회사를 설립하고, 해상과 육상의 운수업을 지배해 갔다. 이에, 국내 기업가들은 외국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그들에 대항하려 하였고, 해운 회사, 철도 회사, 광업 회사 등을 설립하여 민족 자본의 토대를 굳히고자 노력하였다.1) 대한 협동 우선 회사(1900), 인천 윤선 주식 회사(1900) 등의 해운 회사와 이운사(1899), 통운사(1901) 등의 육운 회사 등이 설립, 운영되었다. 또, 철도 부설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상황에서, 일부 기업가들은 부하(釜下) 철도 회사(1898), 대한 철도 회사(1899) 등 내국인 자본에 의한 철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광산 채굴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가는 데 자극을 받아 해서 철광 회사(1900), 수안 금광 합자 회사(1903) 등 광업 회사가 설립되었고, 기타 각종 회사가 무수히 설립되었다.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

개항 이후, 여러 가지 제약된 조건 아래에서도 근대적 산업 자본이 성장해 갔다. 개항 이전에 이미 발달하였던 유기 공업과 야철(冶鐵) 공업을 계승하여 서울에 조선 유기 상회라는 합자 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개항 이전에 농가 부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면직물의 생산은 외국산 면직물의 수입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민족 자본에 의하여 대한 직조 공장, 종로 직조사 등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발동기를 이용한 생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연초 공장, 사기 공장 등도 설립되었다.

한편, 개항 직후부터 일본의 금융 기관이 침투하고, 일본 상인에 의한 고리 대금업이 성행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자본으로 은행들을 설립하였다. 최초로 설립된 조선 은행은 관료 자본이 중심이 된 민간 은행으로서, 국고 출납 업무를 대행하고 지방에 지점도 두었으나, 곧 폐쇄되었다. 이어서, 한성 은행, 천일 은행 등의 민간 은행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은행은 화폐 정리 사업을 계기로 몰락하거나 자주성을 잃고 변질되기도 하여, 한국의 금융은 사실상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처럼, 문호 개방 이후 여러 방면에서 전개된 민족의 근대적 경제 건설을 위한 운동은, 일제의 정치적 압력과 경제적 침탈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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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밖 풍경(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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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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