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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제 약탈

토지의 약탈

개항 이후, 우리 나라는 일제의 자본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일본의 통신⋅교통, 시설의 점유와 확대, 화폐 금융의 침식 등 경제적 침투를 막지 못한 채 국권을 침탈당하였다.

국권 피탈 후, 각종 산업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단행된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으로 그 목적은 전국적인 토지 약탈에 있었다. 국권 강탈 이전에 이미 우리 나라에서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법령을 제정한 바 있었던 일제는, 이어서 토지 조사령을 발표하고 막대한 자금과 인원을 동원하여 전국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 농민은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신고 기간이 짧은 데 비하여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 농민들 중에는 일제의 시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민족 감정 때문에 신고를 고의적으로 기피하여 신고되지 않은 토지가 많았다.

일제는 이와 같은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취당한 토지는 전 국토의 약 40%나 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하루 아침에 토지를 약탈당한 농민들은 일제 당국에게 그 부당함을 들어 항의하였으나, 일제 당국은 정당한 사유가 없다 하여 외면하였다.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의 실시는 한국 농민의 생활 기반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종래 농민은 토지의 소유권과 함께 경작권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토지 조사 사업 이후 많은 농민은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은 일본인의 고리대에 시달리게 되었고, 생계 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업의 침탈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우리 나라의 미곡과 각종 원료를 헐값으로 사 가고, 일본에서 만든 제품을 들여 와 비싼 값으로 팔아 이중으로 착취하는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우리 농민을 몰락시키는 토지 조사 사업 이외에도 임업, 어업, 광업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철저한 착취 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산업 경제 활동은 일제가 설립한 금융 조합, 농공 은행 등을 통해 통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민족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회사령은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하고, 허가 조건을 위반할 때에는 총독이 사업의 금지와 기업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억압되고 민족 산업의 성장이 저해되었다.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 등은 조선 총독부와 일본의 대기업이 독점하였고, 인삼, 소금, 담배 등은 조선 총독부가 전매하였다. 이에 민족 자본은 위축되고, 경제 발전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자 일본인의 자본 투자는 경공업에서 중공업 분야로 옮겨졌다. 1926년 함경도에 부전강 수력 발전소가 완성되고, 다음 해에 그 전력을 이용한 조선 질소 비료 공장이 흥남에 세워지면서 중공업에의 투자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는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략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 기지가 되어 일본인의 중공업 투자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임업 부문에서도 산림령에 따른 임야 조사 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거의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이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에게 점탈되었다.

어업 부문에서의 침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한국 해안에 침입하여 우리 어민보다 우수한 선박과 기구로써 많은 어획고를 올리던 일본 어민은, 1910년 이후 조선 총독부의 후원하에 우리 어장을 독점하였다.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우리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어민들은 빼앗긴 어업권의 회복과 수호를 위한 항쟁을 전국의 어장에서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주요 어장을 독점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민족별 연해 어업 상황(1918)
  한국 일본
출어 어선 수 39,000 14,118
출어 인원 272,077 74,349
1척당 어획고(원) 376 1,289
1인당 어획고(원) 54 245
최근 조선 사정 요람, 1920

광업에서도 조선 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우리 민족의 광업 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군수 광산물의 수요가 격증하자, 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광산물 약탈이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재벌들이 광업에 참여하였고, 생산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민족별 가동 광구 수 및 광업 생산액 (단위 : 1,000원)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광구수 광업 생산액 광구수 광업 생산액 광구수 광업 생산액
      (%)     (%)     (%)
1911 90 296 4.8 103 1,401 22.6 14 4,488 72.6
1912 82 181 2.7 94 1,683 24.7 18 4,949 72.6
1913 104 276 3.4 150 1,934 23.7 30 5,987 73.0
1914 84 313 3.7 195 1,783 20.9 22 6,425 75.4
1915 108 384 3.7 182 2,820 26.8 19 7,311 69.5
1916 172 1,042 7.4 290 3,622 25.7 16 9,413 66.9
1917 144 857 5.1 404 7,615 44.7 15 8,584 50.2
1918 94 299 1.0 434 24,673 80.1 6 5,865 18.9
1919 36 78 0.3 287 19,767 77.8 5 5,568 21.9
1920 23 89 0.3 150 19,337 80.0 5 4,777 19.7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

식량의 수탈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자본주의 기반을 급속하게 키울 수 있었던 일제는, 고도 성장을 위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보다 강화하였다.

일제는 공업화 추진에 따라 부족한 식량을 우리 나라에서 착취하려는, 이른바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워, 이를 우리 농촌에 강요하였다. 192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추진된 산미 증식 계획은 920만 석 증산이라는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증산량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토지 개량 사업을 통한 증산을 꾀하였으나, 이 계획도 목표한 대로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곡 수탈만은 목표한 대로 수행함으로써 우리 나라 농촌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게 하였다. 증산량보다 훨씬 초과한 양의 미곡을 수탈당함으로써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에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미곡 생산량과 일제의 수탈량(단위 : 천 석)
연도 생산량 지수 수탈량 지수
1912~1916(평균) 12,303 100 1,056 100
1917~1921 14,101 115 2,196 208
1922~1926 14,501 118 4,342 411
1927~1931 15,798 128 6,607 626
1932~1936 17,002 138 8,757 829
1937 19,410 159 7,161 678

대륙 침략과 총동원령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산업은 기술의 발달, 기업의 합리화로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상품의 구매력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하자 공급 과잉 현상을 초래하였고, 1929년 뉴욕의 증권 시장에서 주가가 갑자기 폭락하여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이 공황은 급속도로 세계 각국에 파급되어 경제 파탄이 초래되었다.

경제 기반이 약했던 일본도 큰 타격을 받아 도시 실업자가 증가하고 농촌 경제가 붕괴되어 파업과 소작 쟁의가 빈번히 일어나 사회 불안이 증대되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나날이 높아 갔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 공황의 타개책으로 대륙 침략을 감행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의 경제 침탈은 193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공업 원료 증산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 이를 우리 농촌에 강요하였다.

또, 일제는 침략 전쟁을 위해 발전소를 건립하고 군수 공장을 세웠으며, 광산을 개발하고, 금속⋅기계⋅중화학 공업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한반도의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보다 철저히 예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중⋅일 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국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국에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군량 확보를 위하여 중단되었던 산미 증식 계획을 재개하고, 목표량을 설정하여 각 도에 할당하였으며, 이것을 다시 부⋅군⋅읍⋅면을 거쳐 각 마을, 각 개인에게까지 할당하였다. 또, 소비 규제를 목적으로 식량 배급 제도를 실시하였고, 더 나아가 미곡 공출 제도도 시행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일본군의 군수품을 충당하기 위하여 각종 가축 증식 계획을 수립하여 가축의 수탈도 강화하였다.

미곡 생산량과 강제 공출량(단위 : 천 석)
연도 생산량 공출량 비율(%)
1941 21,527 9,208 42.7
1942 24,885 11,255 45.2
1943 15,687 8,750 55.7
1944 18,919 11,957 63.2
일제의 경제 침탈사, 아세아 문제 연구소

이어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전쟁 물자 수탈에 광분하였다. 모든 금속제 그릇을 강제로 공출하였는데, 농구, 식기, 제기는 물론, 심지어 교회나 사원의 종까지도 징발하여 전쟁 무기 제작에 이용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우리 나라의 청⋅장년과 부녀자까지 일본, 중국, 동남 아시아, 사할린 등지로 강제 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하거나 노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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