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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3. 독립 운동의 전개
  • (1) 3⋅1 운동

(1) 3⋅1 운동

비밀 결사의 조직과 활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오랜 민족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자주 독립 정신으로 독립 국가 건설을 기약할 수 있었다.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국권을 강탈당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탄압이 가열되자, 의병들은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그 일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면서 무장 투쟁의 전통을 이어 갔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비밀 결사 운동으로 변모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의군부, 대한 광복회,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선명단 등 수많은 항일 결사를 조직하고, 각종 선언문, 격문 등을 통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그리고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광복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이러한 항일 결사는 각지의 교육 기관 및 종교 단체 조직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 그리고 뜻있는 종교인들을 규합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 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착취당하던 농민, 노동자들과도 연결하면서 민족 운동을 널리 확산시켰다.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대한 광복회였다. 이 단체는 군대식 조직으로 박상진이 총사령, 김좌진이 부사령이었으며, 각 도를 비롯하여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그 곳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지의 부호에게 의연금을 납부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친일파를 색출하여 처단하기도 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하여 조직이 일제에 발각되고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많은 단원이 체포당함으로써 활동이 중단되었다.

3⋅1 운동의 태동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을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어,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세계 평화안 등이 논의되었다. 이에 힘입어,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열의를 전달하고, 국제적인 협조를 얻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 투사들의 모임인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파리에 파견하였다.

한편, 국내의 애국 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권 피탈 이래 세계 정세의 변화를 깊이 주목하면서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우리 유학생들은 도쿄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 정부에 통고한 뒤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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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 선언서
2⋅8 독립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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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학생들의 독립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시위 항쟁을 구체화하였다.

3⋅1 독립 선언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마침내 1919년 3⋅1 운동을 일으켰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서울에서는 탑골(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각급 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시가지로 나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지방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따라 일어났다. 온 민족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파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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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의 만세 시위 운동
3⋅1 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의 만세 시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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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육⋅해군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하여 정당한 요구를 주장하던 우리 민족은 무차별 총격에 의해 살상되었고, 가옥과 교회, 학교 등 건물이 방화, 파괴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당하였다.1)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들을 교회에 집합시킨 후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또,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투옥당하였고, 일본 경찰로부터 비인도적인 악형을 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관순의 순국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23,098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사람은 46,948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3⋅1운동의 확산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속하게 확산, 파급되었다. 그런데 3⋅1 운동은 확산되는 과정에서 대체로 3단계의 양상을 띠었다.

첫 번째는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서를 제작, 배포함으로써 만세 시위 운동을 점화한 단계로, 이 때의 독립 운동의 방향은 비폭력주의였다.

두 번째는 학생, 상인, 노동자층이 참가함으로써 시위 운동이 도시로 확산된 단계이다.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상인, 노동자들이 만세 시위, 파업, 운동 자금 제공 등의 방법으로 적극 호응한 시기였다.

세 번째는 만세 시위 운동이 주요 도시로부터 전국의 농촌 각지로 확산된 단계이다. 농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시위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가는 한편, 시위 군중들은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토지 회사,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듯 비폭력주의가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모하여 간 시기였다.

국내 각 지방으로 파급되던 3⋅1 운동은 즉시 국외로 확산되었다. 먼저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용정을 비롯하여 간도 지방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었고, 연해주 지방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들이 시위를 전개한 이래 각지로 파급되었다. 한편, 하와이, 미국, 멕시코 등지의 교민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 행진을 전개하였다.

국외의 3⋅1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일본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2⋅8 독립 선언을 하여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3⋅1 운동의 의의

3⋅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3⋅1 운동을 통하여 주체성을 확인하였고,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천명하였다.

3⋅1 운동은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한 쾌거였으며, 일제에 동조하던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3⋅1 운동은 중국, 인도, 동남 아시아 및 중동 지역에서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3⋅1 운동은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거족적인 항쟁으로 유도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정통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 민주 공화제의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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