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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민족의 독립 운동
  • 5. 민족 문화 수호 운동
  • (3) 교육 운동과 종교 활동

(3) 교육 운동과 종교 활동

조선 교육회

일제 침략하에서, 한국인의 초등 학교 취학률은 일본인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상급 교육 기관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 식민 통치의 변화로 교육 시설이 확장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을 위한 교육 시설 확장인 것이며, 한국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정규 학교에서의 교육은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서 한국인을 위한 민족 교육은 거의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종교 계통의 학교, 개량 서당, 강습소, 야학 등이 있었다. 이들 교육 기관은 비록 그 규모는 작았지만, 민족 의식 앙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이러한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여 한규설, 이상재 등의 민족 지도자들은 조선 교육회를 조직하였다.

조선 교육회는 한민족 본위의 민족 교육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여 대학의 설립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조선 교육회는 총독부에 대학 설립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묵살되자, 우리 민족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선 청년 연합회와 언론 기관이 적극 협조함으로써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조선 교육회의 노력으로 이상재를 대표로 하는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결성되었다(1922). 이 준비회에서는 경향 각지에 취지서를 보내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각지에 대표를 파견하여 사회 유지들을 설득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각지에서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그 이듬해 서울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모임에는 민립 대학의 설립을 열망하는 각처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기성회는 대학 설립이 한국인의 재력과 노력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각지에 지방부 조직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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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회원들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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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원칙 아래 1000만 원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 민족의 참여를 위하여 100여 개소에 지방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만주, 미국,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많은 사회 단체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일제는 이에 대신하여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여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려 하였다.

문맹 퇴치 운동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으로 인하여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문맹자가 증가하였다. 문맹자의 증가는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바로 일제가 목표로 하였던 한국인의 우민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3⋅1 운동을 계기로 문맹 퇴치가 급선무임을 자각하여, 이를 실천에 옮겨 갔다.

당시 공립 보통 학교는 수용 능력이 많이 제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비가 비싸서 우리 노동자나 농민, 그리고 도시 빈민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각지에 야학이 설립되었는데, 이들 야학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여 가르치는 교과목도 조선어 중심이었다. 그리고 어느 야학이건 우리말로 수업을 하였고, 우리글을 가장 중요시함으로써 공립 학교와는 대조적이었다. 더욱이 이 야학은 미취학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남녀까지 받아들여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이에 일제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야학을 탄압하여 문을 닫게 하였고, 이른바 ‘1면 1교주의’ 시책을 강행하여 공립 보통 학교를 증설하였으나, 이에 수용된 한국 아동은 학령 아동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한글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을 언론사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앞장 서서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한 신문사는 조선 일보였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방학 중에 귀향하는 중등 이상의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문맹 퇴치에 힘쓰도록 하였다.

한편, 동아 일보는 계몽 운동인 ‘브 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1) 브 나로도(Vnarod)라는 말은 원래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동아 일보가 전개한 문맹 퇴치 운동은 민중의 생활 개선과 문화 생활을 계몽하려는 의도에서 그 어원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브 나로드 운동은, 당시 2천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 명이 문맹자라는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 절약 등 생활 개선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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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 나로드 운동 포스터
브 나로드 운동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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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언론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어 학회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문자 보급 운동에 사용될 교재를 만들었으며, 대부분 사립 학교 교원으로 있던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솔선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 강습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대되어 가자 조선 총독부의 탄압이 가혹해졌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순회 강습이나 문맹 퇴치 운동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져, 민족 교육 운동으로서의 문맹 퇴치 운동은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 대중화 운동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한국인을 식민 통치에 유용한 하급 기술 인력으로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 교육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고등 과학 교육 기관으로는 경성 제국 대학뿐이었고, 이 밖에는 기능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 학교가 고작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을 위한 과학 교육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3⋅1 운동 이후 세계 열강이 부국 강병의 수단을 과학 기술의 진흥에서 구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민족 지도자들은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는 지름길은 과학의 진흥에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처음으로 등장한 전차, 항공기 등 과학 기술의 성과는 당시 과학 기술 만능이라는 생각을 세계에 불러일으켜,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서 과학 기술의 진흥에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항공기는 과학 기술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우리 민족에게 큰 감명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의 비행술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과 긍지를 온 민족에게 심어 주었다. 당시 동아 일보를 비롯한 민족지와 잡지 등에서도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명 학회와 과학 문명 보급회가 창립되었고(1924), 그 후 유사한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들 단체는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계몽하면서 민립 대학과 연구 기관의 설립, 외국 유학의 장려를 위한 기금 적립을 추진하였다.

발명 학회는 과학 종합 잡지인 과학 조선을 창간하고, 과학의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과학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뒤에 과학 지식 보급회를 설립하여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주장하였으며, 과학 도서의 편찬과 간행, 강연회, 전시회 등의 개최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1930년대 말 일제의 강요로 일제가 만든 과학 단체에 강제로 흡수되고 말았다.

종교 활동

일찍부터 애국 계몽 운동에 공헌해 왔던 개신교는, 국권 피탈 이후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족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여 그 지도자들의 일부가 체포, 투옥되기도 하였다.

한편, 천주교는 개화기 이래 전개해 온 고아원, 양로원의 설립 등 사회 사업을 계속 확대시켜 가면서 경향 등의 잡지를 통해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일부 천주교도들은 만주에서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3⋅1 운동을 주도한 후 제2의 독립 선언 운동을 계획하였고, 언론⋅출판⋅계몽 등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문화 발달과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다.

자주 독립 선언문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민중 여러분!

우리 대한은 당당한 자주 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지난 기미년의 독립 만세 운동은 곧 우리의 전통적인 독립의 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것이고, 국제 정세의 순리에 병진하는 자유, 정의, 진리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력적인 압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자주 독립 운동은 가슴 아프게도 꺾였습니다.…(중략)…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뜻맞는 동지끼리 다시 모여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선언합니다.…(후략)…

천도교와 더불어 민족 종교의 양대 세력을 이룬 대종교는 일찍부터 본부를 만주로 이동하고 단군 숭배 사상을 널리 전파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민족 교육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항일 독립 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2) 대종교에서는 1911년 만주에서 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항일 무장 단체인 중광단을 결성하였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이를 확대, 개편하여 북로 군정서를 설립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부대는 청산리 대첩의 주축을 이루었다.

호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 온 불교계도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한용운 등은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통합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과감히 맞서서 민족 종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한편, 박중빈은 원불교를 창시하고,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워 갔으며, 남녀 평등, 허례 허식의 폐지 등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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