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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한국의 현대 사회

(2) 한국의 현대 사회

광복 직전의 건국 준비 활동

국내외에서 민족 독립 운동을 추진하던 단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자, 건국을 위한 준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단체들을 한국 독립당으로 통합하여 그 지지 기반을 강화한 후, 대한 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건국 강령은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과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 등을 규정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조선 민족 혁명당의 지도자들을 받아들여 정부의 체제를 개편하였으며, 조선 민족 혁명당이 이끌었던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한국 광복군을 보강하고, 항일 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중국의 화북 지방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강령으로 내세웠으며, 그 밑에 조선 의용군을 거느렸다. 국내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일부의 지도자들이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하고, 일제의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을 추진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 후에 민주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8⋅15 광복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해 온 독립 투쟁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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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기쁨
광복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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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은 온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맞서서 투쟁해 온 결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은 민족 운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독립 운동의 방법도 무장 투쟁, 외교 활동, 민족 문화 수호 운동 또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줄기차게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국제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독립 국가 수립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국토의 분단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 영국, 중국의 3국 수뇌는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그 뒤 포츠담 선언에서도 재확인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립은 이미 국제 사회에서 약속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우리 나라는 곧장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없었다. 그것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서 38도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국군이 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족이 열망하였던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은 어렵게 되었고, 미⋅소의 군대가 실시하는 군정이 민족 분단을 점차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국토가 분단되는 민족적 비극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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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안내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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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주둔했던 남한에서는 조선 총독부를 대신해서 미 군정청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 군정청은 우리 나라에 새로운 서양의 정치 제도와 사상, 문화를 도입하였는데,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 질서와 제도, 서양의 과학 정신,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 등이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일제가 패망하자 즉각 건국을 위한 자발적인 조직체를 만들어 독립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또, 임시 정부가 귀국한 후에 힘을 합쳐서 독립 국가를 이룩하자는 한국 민주당과 같은 정치 세력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국외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귀국함에 따라 정치 세력들 간에 건국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은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8⋅15 광복 이후 경제도 급등하는 물가와 쌀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의 결핍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국민의 일상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 군정은 처음에는 남한 실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회 교란으로 각지에서 유혈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진주로, 자주적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던 민족주의 인사들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그 대신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이 전개되었다.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으며, 그들에 반대하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숙청하였다.

신탁 통치 문제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분단되고,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1945. 12.).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을 최고 5년 동안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는 강대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 민족에게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우리 민족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는 제2의 광복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지만, 그들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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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유인물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신탁 통치 반대 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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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었으나, 처음부터 난항에 직면하였다. 소련은 신탁 통치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 단체만을 미⋅소 공동 위원회와의 협의 대상으로 참여시키자고 주장하였고, 미국은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련의 주장은 신탁 통치를 지지하는 공산당만을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시키려는 의도였다. 두 차례의 미⋅소 공동 위원회의 회의는 미⋅소 간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끝내 아무런 합의도 얻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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