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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6⋅25 전쟁

(2) 6⋅25 전쟁

북한 정권의 수립

8⋅15 광복 이후 북한 주민들도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감격으로 기쁨에 차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어 중앙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리면서 자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을 소련식 소비에트 체제로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당국자들은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나아가 남한까지도 공산화하려고 하였다. 소련은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1946), 그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만의 임시 인민 위원회이지 사실은 공산주의 정부로서 북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 것이었다.

이렇게 수립된 북한의 임시 인민 위원회는 공산주의 방식으로 사회 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 개혁법을 제정하여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단행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녀 평등법을 제정해서 여성 노동력까지 산업 현장에 동원하였으며, 산업 국유화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 체제를 강화시켰다. 그 결과, 북한은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시로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인민 공화국으로 고치고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1948. 9.). 이와 함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남침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최신 무기를 갖추는 등 비밀리에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에서의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선전 활동과 교란 작전을 벌여 남한 여러 지역에서 연이어 소요 사태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 사회 불안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이들 사건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군경의 힘에 빌려 산간에 숨어 들어간 후에도 계속 관공서를 습격하고 양민을 학살하면서 군경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대한 민국이 그 기반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들을 진압하게 되었다.

6⋅25 전쟁과 공산군의 격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교란으로는 대한 민국 정부의 전복이 어렵게 되자 화⋅전 양면 작전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겉으로는 평화 협상을 내걸었지만, 속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시점을 면밀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북한은 통일 정부를 이룩하기 위한 남북한 지도자들 사이의 정치 협상을 주장하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 무렵 한반도에 진주해 있던 미군이 철수하였으며,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김일성은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남침을 위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무력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대한 민국 국군은 자유 수호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북한 공산군이 무력으로 남침하자, 유엔은 즉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북한의 남침은 불법적인 군사 행동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대한 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군대로 구성된 유엔 군은 국군과 함께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과 유엔 군은 1950년 8월부터 반격을 개시하여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반전시켰으며, 9월 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서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국군과 유엔 군은 평양을 함락하고 그 해 겨울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이렇듯 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시점에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한때 한강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곧 이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38도선 부근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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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서울 수복
9⋅28 서울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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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평양 진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국군의 평양 진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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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과 전후 복구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공산군측은 소련의 유엔 대표를 통해서 휴전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측의 휴전 제의에 대하여 우리 정부와 국민은 일단 휴전하게 되면 민족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을 반대하는 범국민적 시위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열망과는 달리 유엔 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고 말았다(1953).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일어났던 6⋅25 전쟁은 3년 동안 한반도 전역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이 전쟁으로 남한의 사상자 수만 해도 150만 명에 달하였고, 수많은 전쟁 고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건물, 도로, 공장, 발전 시설 등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북 간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적대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평화적인 통일보다는 대결의 국면으로 치닫는 민족의 비극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휴전 이후, 대한 민국은 먼저 황폐된 국토의 재건과 산업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 국민 모두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복구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미국 등 자유 우방들도 대한 민국을 적극 원조해 주었다.

이에 산업 시설이 급속도로 복구되었고, 생산 활동도 회복되었으며, 사회 모든 영역이 점차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 결과로 경제 발전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또,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다시는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으며,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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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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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생존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 발전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사회적으로는 격심한 인구 이동으로 가족 제도와 촌락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문화가 무분별하게 침투되어 우리의 전통 문화에 역기능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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