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6차(하)
  • Ⅳ. 현대 사회의 발전
  • 3.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 (1) 4⋅19 혁명과 민주주의의 성장

(1) 4⋅19 혁명과 민주주의의 성장

이승만 정부

이승만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반공을 강조하였으며, 미국 등 우방 국가와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후방에서도 공산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계엄을 실시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조처들은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였으며, 국회의 정상적인 정치 활동까지도 제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국민의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위해서 다시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사사 오입 개헌이다. 이 헌법의 개정을 반대하였던 정치인들은 민주당을 조직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 견제하였다. 그 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추구하면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부정과 부패가 심화되었다.

4⋅19 혁명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면서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4⋅19 혁명을 일으켰다.

4⋅19 혁명은 3⋅15 선거 당일에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마산 의거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함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자유당 정권은 오히려 이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발표하여 시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뒤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드디어 4월 19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여기에는 일반 시민들도 가세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확대보기
4⋅19 혁명
4⋅19 혁명
팝업창 닫기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으로서 우리 민족의 민주 역량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장면 내각

4⋅19 혁명 후의 혼란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허정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과도 정부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로 민주당이 압승하여,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 총리로 선출하였다.

장면 내각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안보 체제를 확립하면서 경제, 사회의 발전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여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을 앞당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당 내의 심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자유만을 주장하면서 자제할 줄 모르는 일부 국민들의 과도한 욕구 분출로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장면 내각은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