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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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7차
  •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1. 고대의 정치
  •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의 중앙 정치는 고구려의 경우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백제는 왕 밑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랏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집사부 등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읽기자료

백제의 정사암 회의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政事巖)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도움글

관등제의 의미

관등제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한 것으로,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 관계를 이룬 것이다. 고구려는 4세기경에 각 부의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0여 관등을 두었고,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미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틀을 마련하였다. 신라도 법흥왕 때에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다.

귀족 회의체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대표적인 귀족 회의체이다.

삼국의 지방 통치

삼국은 외형상 중국의 군현 제도와 유사한 지방 조직을 설치했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의 수가 많지 않아서 주요 거점만을 지배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하였다.

촌주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촌락 내의 행정과 군사 실무의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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