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7차
  •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3. 근세의 정치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 사림의 정치적 성장

사림의 정치적 성장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3사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훈구 대신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중종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그 뒤 중종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그러나 사림 세력은 서원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훈구 세력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광조의 개혁 정책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전남 화순)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