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고, 결국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였다(1623).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서인과 남인은 모두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정파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붕당 정치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조정에서 어떤 정책을 논의할 경우, 각 붕당은 그 정책이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고,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면서 토론을 벌였다. 이렇게 수렴된 여론을 공론이라 하는데, 공론이 중시되면서 합좌 기구인 비변사와 언론 기관인 3사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이 출현하였고, 서원이나 향교가 지방 사족의 의견을 모으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