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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근세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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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취 제도의 문란

수취 제도의 문란

16세기에 이르러 수취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폐단이 심해지면서 몰락하는 농민이 증가하였다. 공납에서는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이라는 폐단이 나타났다. 방납이 증가할수록 농민의 부담도 증가하였다. 공물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이 도망을 하면 그 지역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신 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망 농민이 더욱 증가하였다.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는 수령도 나타났고, 이이유성룡 등은 공물을 쌀로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고 요역 동원으로 농사에 지장을 가져오자, 농민은 요역 동원을 기피하였다. 이에, 농민 대신에 군인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 등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도 이런 힘든 군역을 기피하였다.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군포 부담의 과중과 군역 기피 현상으로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적도 부실해졌다. 각 군현에서는 정해진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 부족한 군포를 부담시키자, 남은 농민도 생활이 더욱 어려워 졌다.

환곡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곤궁한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10분의 1 정도의 이자를 거두는 제도였다. 그러나 지방 수령과 향리들은 정한 이자보다 많이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민이 증가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어 양반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읽기자료

16세기 농민들의 처지

○ 백성으로 농지를 가진 자가 없고, 농지를 가진 자는 오직 부유한 상인과 사족(士族)의 집뿐입니다. 〈중종실록〉
○ 근래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공공연하게 노략질을 하며 양민을 죽이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여도 주현에서 막지 못하고 병사(兵使)도 잡지 못하니, 그 형세가 점점 커져서 여러 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떼로 일어나 빈 집에 진을 치고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지고 칼로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명종실록〉
○ 지방에서 토산물을 공물로 바칠 때,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납을 일체 막고 본래 값의 백배가 되지 않으면 받지도 않습니다.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세금을 못 내고 도망하는 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선조실록〉
군적(육군 박물관 소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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