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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영 광산의 증가

민영 광산의 증가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상업 자본이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졌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몰래 채굴하는 경우도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읽기자료

조선 후기 광산촌의 모습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수안에는 본래 금광이 다섯 곳이 있었다. 두 곳은 금맥이 다하였고, 세 곳만 금맥이 풍성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장마가 심해 작업이 중지되어 광꾼들 대부분이 흩어졌다. 금년(1799) 여름에 새로이 39개소의 금혈을 팠는데, 550여 명의 광꾼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부가 도내의 무뢰배들이지만, 대부분은 사방에서 이득을 쫓아 몰려온 무리이다. 그리하여 금점 앞에는 700여 채의 초막이 세워졌고, 광꾼과 그 가족, 좌고, 행상, 객주 등 인구도 1500여 명에 이른다. 갑자기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그 곳에서는 생필품의 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변사등록

덕대(德大)

광산의 주인과 계약을 맺고 광물을 채굴하여 광산을 경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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