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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과정

고려 사회의 개방성

① 삼국 이전에는 과거의 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으니, 이 때부터 문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법은 대체로 당의 제도를 많이 채용한 것이다.

② 고려의 신분 제도는 조상의 신분이 그대로 자손에게 세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향리가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향, 부곡, 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외거 노비 중에는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1. 위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신분 변동이 가능하였던 경우를 정리해 보자.

2. 고려 시대의 신분 제도가 통일 신라와 비교하여 다른 점을 분석해 보자.

고려 시대의 신앙

① 내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五岳), 명산, 대천, 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사한 신하가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를 늘리거나 줄이자고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 속에 행여 행사일이 황실의 제일(祭日)과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고려사〉

② 나주 사람이 일컫기를 “금성산의 산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진도, 탐라(제주)를 정벌할 때에는 실로 내가 힘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 녹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으로 봉하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정)가신이 그 말에 미혹(迷惑)되어 (충렬)왕에게 넌지시 아뢰어 정녕공으로 봉하게 하고, 또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당에 보내 주게 하였다. 〈고려사〉

1. 위의 자료에서 고려 시대의 민간 신앙을 찾아보자.

2. 위의 자료를 참고하여 고려의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의식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을 추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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